가시밭길 생일파티 #15

#15

by Clare Kang

“누구게~?”

두 손이 레스휘나의 눈앞을 가렸다. 대리석처럼 차가운 손.

“시스, 나왔구나.”

시링크스는 눈을 가리던 손을 치우며 그녀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즈엘이 준비해 준 예복을 입고 있었다. 허리라인을 날렵하게 살린 짙은 남색의 상의에 검은색과 흰색의 실로 수놓아진 바지. 제법 춥게까지 느껴지는 가을바람이 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상의의 금색 단추를 모조리 풀어놓아 하얀 셔츠의 주름조차 그대로 보였다. 셔츠조차 두 번째 단추까지는 풀어놓았기 때문에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럼 아가씨, 춤이라도 한 곡.”

시링크스가 장난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아아, 전 매너 없는 아저씨는 질색인데.”

레스휘나가 짓궂게 대답했다. 시링크스는 알았다는 듯이 단추를 대충 잠갔다.

“자, 이제 매너가 갖춰졌으니 응해 주시겠습니까?”

레스휘나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세 박자의 느릿한 왈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둘씩 손을 맞잡고 천천히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시곗바늘처럼 돌고 있었다. 레스휘나와 시링크스는 그런 사람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스치듯 지나가며 자신들의 댄스에 몰두했다.

“시스 오라버님, 기억나세요?”

“뭐가 말인가요, 레스휘나?”

시링크스는 레스휘나의 질문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렸을 때 말이죠. 제가 춤추고 싶다고 졸랐을 때 세스 오라버님이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던 것 말이에요.”

“아아, 기억나고 말고요.”

시링크스는 손을 고쳐 잡으며 대답했다.

“그땐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춤추는 것이 소녀의 작은 소원이었지요.”

레스휘나는 수줍은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멋진 남자랑.”

시링크스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시선을 맞췄다.

“죄송하네요. 그 작은 소원 하나 못 이뤄드려서요.”

“하하 시스 오라버님은 아름다우시니 상관없어요.”

레스휘나는 유쾌하게 웃으면서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시링크스의 손목을 잡아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오라버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스휘나가 밝게 웃었다. 시링크스는 아무래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레스휘나가 걱정이 되어 그녀를 위로해 줄 겸 나온 것이었다. 레스휘나는 그런 시링크스의 배려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마시다 만 오렌지주스 잔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낯선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하즈엘이 서 있었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금갈색의 머리카락에 하얀색 예복을 입은 그 사람과 함께. 그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걸어왔다. 그의 뒤를 하즈엘이 쫄래쫄래 따라왔다.

“실례지만 레이디, 이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는 정중히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레스휘나는 내키지는 않는 표정이었지만 예의 바르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였다.

“소녀는 레스휘나라 하옵니다.”

그녀가 성을 밝히지 않자 청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뒤따라온 하즈엘이 재빨리 청년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그녀는 개인적인 친분으로 알게 된 사이입니다.”

그리고 하즈엘은 레스휘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레스, 이 분은 황태자이신 키란시르드 에우르페 휘란세 전하이십니다.”

레스휘나는 자신의 앞의 그 잘생긴 청년이 황족이라는 사실은 약간 놀라웠지만 그다지 흥미는 없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반대로 그녀가 매우 흥미 있는 존재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레스휘나에게 말을 걸었고 레스휘나는 그의 심경을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대꾸했다. 하즈엘은 이 조심성 없는 황태자가 레스휘나를 자꾸 건드리는 것이 불안했다. 하지만 그런 불안을 직접적으로 표하지는 못하고 단지 소매를 자꾸 접었다 폈다 할 뿐이었다.

“잠시 나가서 이야기하지 않겠어?”

그는 이미 편한 마음으로 레스휘나에게 존칭을 생략했다. 레스휘나는 그런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황공하옵니다. 황태자 전하.”

키란시르드는 활짝 웃으며 레스휘나에게 에스코트의 의미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레스휘나는 하얗고 가느다란, 차가운 왼손을 그의 오른손 위에 사뿐히 올려놓았다. 아름다운 두 남녀의 모습에 감탄을 할 만도 하지만 레스휘나가―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성격을 잘못 건드렸다가 그 피해를 받을 황태자가―걱정이 되는 하즈엘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인파 사이로 사라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시링크스는 레스휘나와 헤어진 뒤 곧장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르시우스의 옆으로 갔다. 세르시우스와 같이 춤추던 소녀는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는 홀로 덩그러니 쿠키 몇 개를 서서 집어먹고 있었다. 몇몇 아가씨들이 곁눈질로 그를 쳐다보긴 했지만 무신경한 것인지 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링크스는 그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세르시우스가 보고 있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키란시르드와 이야기하고 있는 레스휘나에 가서 닿아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키란시르드와 함께 밖으로 나가는 레스휘나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고 있는 세르시우스에게 시링크스가 물었다.

“뭐랄까, 애지중지 길러온 내 딸을 빼앗기는 것 같아서.”

시링크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레스는 세스형 딸이 아니잖아.”

세르시우스는 얼굴이 뚫어지도록 시링크스를 쳐다보았다.

“느낌이 그렇다고.”

그는 허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황태자의 안내를 끝낸 하즈엘을 찾아 체스게임이나 할까 하고 생각하며 시링크스는 그 자리를 떴다.



초가을임에도 저녁 날씨는 꽤 쌀쌀했다. 희미한 수은등 하나와 차가운 달빛만이 테라스와 그곳에서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과 한 마리의 용―을 창백하게 비추고 있었다. 달빛에 비치는 상아를 깎아 만든 인형처럼 매끈하고 하얀 살결, 그리고 가벼운 바람에 살랑살랑 거리고 있는 밤하늘을 닮은 검은색의 긴 머리칼, 짙은 남색의 눈동자의 레스휘나는 어느 부잣집의 귀한 딸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만큼 훌륭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하얀 피부는 화려한 샹들리에의 조명보다 창백한 달빛에 더욱 돋보이는 것 같았다. 키란시르드는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자꾸 말을 건넸지만 실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본인조차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레스휘나는 테라스에 살짝 기대어 밤하늘의 푸른 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가족으로는 두 오빠가 있다고?”

“그렇습니다. 두 오라버님께는 늘 폐만 끼치고 있습니다.”

많은 인파를 싫어해서 방에 돌아가 뒹굴뒹굴 거리다가 자고 있을 시링크스와 또 이름 모를 아가씨와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르는 세르시우스를 생각하며 레스휘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언제나 소녀에겐 과분한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몸을 약간 뒤척였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는 대화를 이끌어 나가려던 키란시르드가 입을 다물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몇 번인가 얘기를 꺼내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레스휘나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첫눈이건 아니건, 그 감정이 진짜라면 믿어야지요.”

레스휘나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키란시르드는 허탈한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렇군.”

그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 저 푸른 별에서 불어오는 듯한 차가운 바람.

레스휘나는 우아하게 몸을 반 바퀴 돌려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그맣게 입술을 움직였다.

“조금 춥습니다.”

물론 속에는 ‘이제 그만하자.’라는 의미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키란시르드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멋쩍게 웃으면서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그럼 그만 들어갈까?”

하고 아쉬운 투로 말했다. 밤이 깊어 샹들리에의 불이 환하게 켜진 커다란 연회장, 수많은 남녀의 사이로 그들은 발을 옮겼다.

작가의 이전글가시밭길 생일파티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