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레스휘나, 궁으로 오지 않겠어?”
순간 식탁 위에서 바쁘게 고기를 썰고 그 조각을 입으로 나르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손들이 정지해 버렸다. 그리고 그 손들의 주인들은 그 말이 나온 근원지인 황태자의 얼굴을 무례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았다. 키란시르드는 레스휘나를 보면서 싱글싱글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레스휘나는 잠시 키란시르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오렌지주스를 살짝 들이키고 입을 열었다.
“호호호. 황태자 전하.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녀는 친절하리만치 생긋 웃어 보였다. 하즈엘은 ‘드디어 터졌구나!’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레스휘나의 왼쪽에서 키란시르드와 레스휘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시링크스는 다시 조용히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곧 이 식탁이 뒤집혀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엄습했다. 이럴 때는 하나라도 더 먹어 두는 것이 좋은 것이다.
키란시르드는 화를 내거나 고집부리지 않고 쿡쿡쿡 하고 웃었다. 레스휘나는 그를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했는지 다시 손을 움직여 멈춰버린 식사를 재개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포크가 두 번째 고기 조각을 그녀의 입속에 집어넣는 순간 키란시르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탁자로 손을 탕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황태자의 권한으로 너를 나의 궁으로 초대한다.”
그는 진지한 표정―그러나 아직 약간은 웃음기가 남아있는 표정―으로 레스휘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즈엘은 불안함에 야채들을 포크로 사정없이 쑤시면서 생각했다.
‘역시 저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하는 것이었어.’
가드리안의 세 남매와 오붓하게 식사를 하려던 순간 “내가 같이 해도 되겠나?”라며 끼어든 키란시르드였다.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터라 수락하긴 했지만 하즈엘로서는 엄청나게 내키지 않는 행동이었다.
레스휘나는 그가 뭐라고 하던 상관하지 않기로 했는지 입을 열심히 씰룩거리며 두 번째 고기 조각을 씹었다. 맞은편에 서있는 키란시르드 스스로가 무안하다고 느낄 만큼 오랫동안 세워둔 후에야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 비록 제가 함부로 말씀해 드릴만큼 대단한 존재는 아니오나, 저는 인간이 아니옵니다. 따라서 전하 당신이 황제일지언정 그것은 제게 있어 대단한 것도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저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법률을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레스휘나는 자신의 깔끔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키란시르드는 놀란 듯한 표정을 잠시 지었지만 환한 미소를 지었다. 레스휘나가 인간이 아니라도 자신은 상관이 없다는 태도인 듯했다. 하즈엘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레스휘나가 자기 입으로 밝힌 것은 사실인 데다가, 상대는 입막음 같은 게 통할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밥맛이 떨어져 버려 아예 포크와 나이프에서 손을 떼어버렸다.
“그러나.”
잠시 흐른 정적을 깨고 레스휘나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친구는 되어드릴 수 있사옵니다.”
그녀는 간결하게 말을 내뱉고 냅킨으로 조용히 입을 닦았다. 그녀는 약간 얼이 빠진 듯 그녀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는 키란시르드를 보고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하즈엘의 생일은 하즈엘 본인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최악의 날인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을 방문해 준 수많은 사람들의 인사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들어야 했다. 게다가 ‘특별한 손님’ 키란시르드의 안내까지 맡아야 하는 이번 생일은 바쁘기가 그지없었다. 보통 높은 사람들부터 찾아가는 것이 순리였기 때문에 당연히 귀족이 아닌 세 남매에 대한 대접은 뒤쪽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세 남매는 그의 상황을 이해하고, 조급하게 굴지 않았다. 어차피 만난 김에 며칠 더 묶을 테니 얘기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쟤는 아직도 안 가고 뭘 하느라 우리 하즈를 괴롭히는 거야.”
저만치 멀리서 하즈엘을 달고 어디론가 휘적휘적 걸어가는 키란시르드를 쳐다보며 레스휘나가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나름대로 할 일이 있나 보지.”
시링크스가 대꾸했다. 둘은 테라스에 나가 서있었다. 연한 살색의 커튼과 세르시우스가 읽다 만 책 몇 장이 바람에 넘어갔다. 세르시우스는 팔랑팔랑 거리는 책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테라스 바닥으로 날아온 낙엽 한 조각을 손으로 집은 시링크스는 그것을 가만히 바람에 실려 보냈다.
“나 잘못한 걸까?”
레스휘나가 조금도 움직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시링크스는 무슨 말인가 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제 말이야.”
레스휘나는 설명하듯이 덧붙였다.
“아아.”
시링크스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은 모르지. 시간이 지나 봐야 알지.”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어 말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마.”
그는 돌로 만들어진 난간에 손을 갖다 대었다. 가을 햇볕이 따뜻하게 데운 차가운 돌. 그 차가운 돌 사이사이로 파란 나무와 붉은 흙이 가득한 정원이 보인다.
“산책이나 하고 올까, 레스?”
레스휘나는 고개를 저었다.
“왠지 피곤해.”
“그럼 나 혼자 갔다 올게.”
시링크스는 뭔가 생각난 듯이 싱긋 웃으며 테라스 안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멀어져 가는 모습조차 쳐다보지 않으며 레스휘나는 혼자만의 생각에 깊이 빠졌다.
시링크스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느낌이 굉장히 푹신했던 것으로 보아 뚱뚱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일단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드는 순간 그대로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녀―어쩌면 ‘그’ 일지도 모르지만―의 모습이 너무나 신선하고 충격적이기 때문이었다. 죽 찢어진 눈매에 부엉이처럼 커다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하마처럼 큰 입을 자꾸만 씰룩이고 있었다. 어떻게 그 많은 살들을 붙이고 다니는지 궁금할 정도로 살이 뒤룩뒤룩 찐 데다가 손가락 마디마디가 비엔나소시지를 연상하게 했다.
“아, 저어.”
그는 모깃소리만큼 작은 소리를 냈다. 그녀의 모습에서 어딘가 위축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녀는 없는 목을 돌려 그를 힘겹게―실은 그녀는 힘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시링크스가 보기엔 충분히 힘겨워 보였다―내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시링크스는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하즈엘이었다. 그녀는 하즈엘을 보고 씨익 웃었다.
“아소반 공, 이 귀여운 분도 당신의 손님인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녹인 버터와 젤리를 버무려놓은 듯 끈적끈적한 목소리였다. 하즈엘은 시링크스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렇다고 그녀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저에게 이 귀여운 손님을 소개해주지 않으시겠어요, 아소반 공?”
하즈엘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그 오만하고 머리가 비어 보이는 그녀는 하즈엘을 자꾸 재촉했고, 그는 하는 수 없이 시링크스를 그녀에게 소개해 주었다.
“후커 부인, 이쪽은 제 오랜 친구 시링크스입니다. 그리고 시스, 이분은 후커 백작부인이셔.”
“처음 뵙겠습니다. 시링크스라고 합니다.”
시링크스는 정중하게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것이 기뻤기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 근육들은 일그러져 이상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시링크스는 그런 것은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지 혹은 무시하는지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부인 같은 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빈 말이어도 기뻤는지 부인의 표정은 조금 더 기쁨을 나타내었다. 그녀는 시링크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그의 몸 이곳저곳을 훑어보듯이 눈을 바쁘게 굴렸다. 옆에서 지켜보는 하즈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얼른 그녀가 자신의 친구에게서 떨어져 주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 하즈엘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커 부인은 개구리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시링크스에게 물었다.
“흐음. 참 예쁘게 생겼구나. 너도 ‘천사의 둥지’에 오지 않겠니?”
“‘천사의 둥지’ 요?”
시링크스가 흥미가 당긴 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갑자기 손가방을 뒤져―그녀가 그것을 뒤지기 전에는 아무도 그녀가 손가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작은 카드를 꺼내 시링크스에게 건네주었다. 고급스러운 은색 잉크로 시링크스가 잘 모르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당신과 같이 귀여운 사람은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이 근처에 오면 한번 들리렴. 너처럼 귀여운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링크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찾아뵙지요, 부인.”
그리고 시링크스는 그녀가 지나갈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섰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다리를 저렇게 잘 움직일 수 있을지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녀가 그를 지나 저만치 가버렸는데도 시링크스는 잠시 그 자리에 서있었다. 후커 백작부인을 마음속으로나마 전송하고 있던 하즈엘이 시링크스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뭐 하고 있어?”
“아, 저, 그게”
시링크스는 입을 꾹 다물고 잠시 고민하더니 하즈엘을 진지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계단을 내려가려 했는지 올라가려 했는지 까먹었어.”
하즈엘은 뒤통수를 수박으로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후엔 참을 수 없는 폭소가 그를 엄습했다. 그는 예의라곤 전혀 모르는 사람인 마냥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방에 올라가려던 거야? 아니면 뭔가 하려고 나온 거야?”
하즈엘이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시링크스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곰곰이 고민하다가 생각이 난 듯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생각났다. 고마워 하즈.”
그는 서둘러서 계단을 내려갔다. 하즈엘은 그가 서있던 자리를 보고 쿡쿡 웃었다. 이거 웃음이 멈추질 않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인사해야 할 다른 어떤 손님을 찾으러 발을 옮겼다.
해가 높이 떠서 정원에 있는 나무들의 그림자들은 짧았다. 시링크스는 조심조심 잔디를 밟으며 어디론가 바삐 걸음을 향했다. 테라스가 세 개 나란히 붙어있는 2층을 발견하자 그는 그곳에서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레스휘나는 시링크스가 후커 백작부인을 만나 고생아닌 고생을 하는 동안 테라스에서 방 안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엎드려서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세르시우스는 그동안 피곤했었는지, 아니면 지난밤 잔뜩 시달렸기 때문이었는지 해가 높이 떴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워있어서 약간 비틀어 내려온 안대의 아래로 검붉은 흉터가 드러났다. 레스휘나는 담요를 꺼내 그에게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그는 잠시 몸을 뒤척였다. 여기에 오는 약 한 달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거짓말인 마냥 너무 나른하고 편안했다. 홀리 경은 잘 있을까. 레스휘나는 문득 은발의 제국 기사를 떠올렸다.
“……!”
창 밖에서 뭔가 소리가 났다. 낙엽 몇 개가 테라스 바닥을 뒹구는 것을 보고 레스휘나는 ‘뭐야’라면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이번엔 분명하게 들렸다.
“레스휘나!”
산책이나 하겠다며 나간 시링크스의 목소리였다. 레스휘나는 급하게 테라스로 걸어 나갔다. 시링크스가 손나팔을 만들어서 뭔가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바람이 세게 불어서 인지 그의 말은 띄엄띄엄 레스휘나의 귓가에 가 닿았다.
“ … 해! ……해!”
“뭘 하라는 거야.”
레스휘나는 답답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시링크스는 그녀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분주히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레스휘나는 멀뚱히 서서 그가 하는 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어디에서 집어왔는지 모를 작은 네모난 케이스를 열어 무언가 눈에 익숙한 것을 꺼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 버린 들판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가는 듯한 풍요로운 가을바람처럼 따뜻하고 우아한 음색이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왔다. 다른 용무로 정원을 지나가던 사람 몇 명이 발걸음을 멈추고 시링크스를 쳐다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현 위를 자유롭게 누비며 풍부한 음을 끌어내었다. 레스휘나는 말없이 시링크스를 쳐다보았다. 만일 그들이 꼭 닮은 남매가 아니었다면 시링크스가 레스휘나에게 청혼하는 것처럼 보일만큼 그림 같은 풍경이 하즈엘의 정원에 펼쳐져 있었다. 초가을, 갈색으로 금색으로 물들어 가는 크고 작은 풀잎들 사이에 우뚝 서서 흑단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연주하는 소년.
“미안한가 보다.”
어느새 일어났는지 세르시우스가 방 안에서 레스휘나가 들릴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스휘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한 손에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레스휘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뭐가 미안해?”
“그때 널 놔두고 가버린 거 말이야. 네 기분 맞춰주려고 저러는 거잖아. 고맙다고 해줘.”
“바보 같아.”
레스휘나가 중얼거리며 다시 시링크스를 쳐다보았다. 시링크스가 멋쩍게 웃으며 바이올린을 어깨에서 내렸다. 더 이상 뭐라고 할 얘기는 없었는지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레스휘나는 조용히 세르시우스를 불렀다.
“세스 오빠.”
세르시우스는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레스휘나는 그에게 계속 등을 보인 채 말을 이었다.
“세스 오빠랑 시스가 내 오빠라서 정말 좋다고, 나중에 시스한테 좀 말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