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내리쬐는 뙤약볕에 소녀는 잠에서 깼다. 너른 들판, 나무 그늘 한 조각 없는 들판에 드러누워 잠들었던 모양이다. 소녀는 옷매무새를 살피며 일어났다. 다행히 조금 헝클어진 머리를 제외하면 괜찮은 것 같았다. 소녀는 머리를 다시 묶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흔들고 지나간다. 해가 떠오른 지 한참인데도 어디선가 수탉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여긴 대체 어디지?"
소녀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꿈인가 싶었다. 하지만 머리를 새로 고쳐 묶는 감각은 너무 생생했다. 그녀의 손끝에 닿는 마른 풀잎도,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바람결도. 수탉이 다시 목청껏 울었다. 주변에 이렇다 할 농가도 안 보이는데 어디에 있는 걸까.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으니 수탉에게라도 가볼 셈이었다. 운이 좋으면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리를 따라 걷다 보니 아름드리나무에 이르렀다. 소녀가 세 명쯤 손을 맞잡고서야 겨우 그 둘레를 맞출 수 있을법한 큰 나무였다. 푸른 잎사귀가 무성했다.
“……!”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소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야 여기.”
이번에는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더니 나뭇잎을 엮어 만든 것 같은 녹색 옷을 입은 소년이 나뭇가지에 앉아있다. 나뭇잎과 꼭 닮은 색이라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피터?”
소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피터는 소녀의 곁으로 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서 와, 웬디.”
피터는 숨이 막힐 정도로 웬디를 꽉 껴안으며 환영의 인사를 전했다. 웬디는 피터의 품에 가만히 안겨있다가 벗어나며 그를 쳐다보았다. 훤칠한 키에 제법 다부진 골격은 분명 다 큰 성인 같은 외모였지만, 장난기가 잔뜩 묻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대체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웬디는 생각했다. 피터는 신난 목소리로 들떠 이야기했다.
“자 가자. 소개해 줄 곳도, 사람도 많아.”
피터는 웬디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잠깐만, 피터.”
웬디는 그를 불러세웠다. 피터는 발걸음을 멈추고 웬디를 돌아보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알고 있지?”
웬디가 물었다.
“그야…. 너는 웬디니까.”
피터는 뭐 그런 것을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웬디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웬디는 좀 더 설명해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웬디. 너는 유일하게 피터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야.”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널… 죽인다고?”
“응. 하지만 넌 날 죽이지 않을 거야, 그렇지?”
피터는 확인하듯 물었다. 웬디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아.”
“그래. 그럼 됐어.”
그리고 피터는 다시 몸을 앞으로 돌려 발을 내디뎠다. 따라서 손목이 붙잡힌 웬디 역시 발을 옮겨야 했다.
“피터, 여긴 어디지?”
웬디가 종종걸음으로 피터를 쫓으며 물었다. 하지만 피터는 묵묵부답이었다. 웬디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어떻게 피터를 알고 있는 걸까. 이곳은 어디일까. 내가 피터를 죽인다는 것은 뭘까. 사람을 죽인다니.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고려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자신에게 그런 권한이 있다는 것은 궁금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이 모든 것에 대답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은 자신의 앞에 있는 피터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열심히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갈 뿐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를 믿고 따라가도 되는지 판단조차 서지 않았다.
그를 따라 숲길을 따라 한참 걸어 들어갔을까, 나무로 지은 오두막이 여러 채 모여있는 넓은 터에 도착했다. 오두막의 지붕은 큰 나뭇잎으로 촘촘히 덮여있다. 오두막이 보이자 피터의 걸음걸이는 조금 느려졌다. 그는 오두막 사이에 위치한 나무 그루터기 쪽으로 손짓을 했다. 웬디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여기 앉아, 웬디.”
그는 여전히 신나 보였다. 웬디는 일단 그의 권유대로 나무 그루터기에 앉았다. 피터는 그 근처 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았다.
“여긴 어디야?”
웬디는 다시 물었다.
“네버랜드. 아이들의 낙원이지.”
피터는 짧게 대답했다.
“내가 너를 당연하게 안다는 것은 무슨 얘기야?”
“그야, 넌 웬디잖아? 웬디와 피터는 죽음으로 연결된 사이인걸.”
피터는 알쏭달쏭 알 수 없는 말을했다.
“그리고…”
웬디는 이 말을 꺼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궁금하면서도 물어봐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피터가 웬디의 표정을 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