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떠났다

by Clare Kang

O월 X일

그녀가 떠났다.


그날은 늦가을의 정취가 만연한 날이었다.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똑같은 시간, 똑같은 현관문으로 나갔다.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하는 것까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처음엔 좀 귀가가 늦어진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그럴 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스름이 다 내리도록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홀로 어둑해진 집에서 말라비틀어진 밥을 꼭꼭 씹어 삼켰다.


좀 더 깊은 밤이 되었다.

해는 이미 졌고 휘영청 밝은 달이 저만치 떠올랐다.

때 묻은 유리창 너머로 뭉개지는 달무리를 올려다봤다.


그날이 다 가도록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O월 X일
그녀가 없는 텅 빈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불 개키는 것을 싫어했던 그녀가 아무렇게나 팽개쳐둔 그대로의 이불에서 한참을 꿈지럭거렸다.

'혹시 잠든 사이 그녀가 돌아온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실망스럽다. 나는 다시 고개를 이불에 파묻었다. 창문 위에 덧씌워진 커튼의 틈새로 햇빛이 새어든다.

얼마큼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배가 고파 일어났다. 어제 먹다 남은 밥을 좀 더 먹었다. 아무런 맛이 없었다. 그냥 묵묵히 씹어 삼키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밥을 다 먹고 한가롭게 집의 여기저기를 살폈다. 혹시 밤새 그녀가 다녀간 흔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소파, 식탁, 작은방, 큰방, 옷장과 빨래건조대, 그리고 화장실까지.

그녀가 여기에 살았던 흔적은 만연했지만 그날 이후로는 모든 것이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그대로다. 손때조차 묻지 않았다. 어지럽게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까지 그대로다. 발로 슥슥 머리카락을 밀었다가 소파에 털썩 누웠다. 그 누구도 앉아있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토록 따뜻하고 안락했던 소파가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소파에서 잠들었다.


O월 X일
새벽에 잠이 깼다. 여전히 혼자 덩그러니 집에 있다.

이제 밥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항상 그녀가 밥을 준비해줬기 때문에, 난 한 번도 꺼낸 적이 없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매번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그녀의 역할이었다. 냉장고에서 곧잘 간식거리를 꺼내기도 했다. 찬장을 열어보려다가 관뒀다. 부엌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쓸쓸한 마음으로 빈 침대에 올라갔다. 폭신한 솜이불에는 아직도 그녀의 냄새가 난다. 나는 다시 잠들었다.



O월 X일
거실 벽 한가운데 달린 커다란 시계만은 그녀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 않고 시시각각 변했다. 째깍째깍 거리는 초바늘만 이 집에서 유일하게 변화하고 있다.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다.
나도 역시.



O월 X일
잠결에 현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리나케 일어나 현관 앞에 섰다. 신발장의 센서등이 '팟'하고 켜졌다.

두런두런하는 말소리. 신발을 끄는 소리. 무거운 걸음걸이.

하지만 그 소리는 현관을 지나쳐갔다.

다시 신발장의 센서등은 꺼졌다.
나는 다시 혼자 어둠 속에 남겨졌다.



O월 X일

첫눈이 내렸다.

창틀에 소복하게 쌓일까 했는데 햇살이 닿자 금세 녹아내렸다.

밖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어린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나는 창밖의 부산스런 소리를 들으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햇빛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거실을 가로질러간다.

누워서 천천히 그것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이윽고 어둠 속에 그림자도 나도 묻혀버렸다.



O월 X일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조용한 집 내부에서 내 목소리만 메아리쳤다.

내 울음소리만 집을 떠나지 않는다.



O월 X일
이젠 여느 때라는 말이 그녀가 없는 시간을 이르는 말이 된 것 같다.

곳곳에 배어있는 그녀의 냄새도 희미해져 간다. 그녀의 얼굴도, 목소리도 모든 게 흐려졌다.

그녀가 없는 집에서,
그녀가 없이 홀로 밥을 먹고,
그녀가 없이 침대에서 다시 잠든다.

이대로 영영 그녀와 이별한다고 생각하니 또 아리송하다. 이 감정이 슬픈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녀가 그립다.

현관문이 잘 보이는 소파에 앉아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인기척이 날 때마다 현관으로 달려가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몇 번의 낮과 몇 번의 밤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모든 것에 무감각해지는 법을 익힌 것 같다.


O월 X일
잠결에 현관문에서 도어록이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다시 이불에 파묻었다. 또다시 쓸데없는 희망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살짝 열린 방문 사이로 옅은 빛이 새어 들어왔다. 나는 느릿하게 기지개를 켰다.

“안녕? 다녀왔어.”


그녀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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