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몇 년 전부터 짝사랑을 해왔다.
상대의 안중에는 내가 없지만, 나는 종종 상대를 기억하고 추억한다.
상대가 나를 지운 지 벌써 6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상대를 두 눈에, 이마에, 손에, 마음에 품고 있다.
한평생 지속될 지독한 짝사랑이란 걸 나는 안다.
외할아버지는 2018년에 고관절을 다치시면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골반에 금이 가는 사고는 치명적이다. 한 번 손상된 뼈는 회복이 더디었고 걸을 수가 없어 침대에 며칠을 누워계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폐렴까지 걸리는 바람에 할아버지의 장기 입원이 시작 됐다. 담당 간호조무사가 있었지만 외할머니와 네 딸들이 돌아가며 할아버지 곁을 지키며 병실 청소도 하고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하루 몇 번씩 병원 주변 산책도 하고 크고 작은 일을 도왔다.
그럼에도 할아버지의 병세는 점점 나빠졌다. 미국에 석사 공부를 하러 떠나기 직전 여름을 회상하면, 할아버지가 미라처럼 바짝 야위어버린 팔로 내 손목을 꽉 움켜잡으며 '담배 하나만 피게 해 줘!' 울부짖는 모습과 잠결에 '엄마! 어머니!'하고 속삭이듯 내뱉는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는 할아버지 앞에 나를 내세우며 '아빠, 얘 누군지 알아? 기억나?' 하고 물으며 할아버지의 꺼져가는 뇌에 스위치를 껐다 켰다 했다. 할아버지는 다소 또박또박하게 정답을 말할 때도 있었고 멍한 침묵으로 응할 때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어쩌면, 이미 할아버지의 머릿속에서의 나는 하루하루 희미해지고 있겠구나,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놀랍게도 반년 이상을 더 버티셨다. 할아버지의 증세가 점점 악화되면서 네 딸들 단톡방에서는 인공호흡기를 떼야한다, 말아야 한다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네 딸들 중 목소리가 가장 컸던 둘은 극 T인 큰 이모와 극 F인 막내이모였다. 둘째와 셋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양극 사이에서 눈치를 봤다. 토론의 결론이 나기 전에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은 엄마가 가족 단톡방에 장문 톡을 남기며 전해졌다. 몇 월 몇 일 몇 시 몇 분에 영면했는지 첫 문장에 쓰여있었다. 나는 한창 미국에서 대학원 동아리 활동을 하던 중이라 무심코 열어 확인했던 카톡에 낯설도록 무거운 메시지를 보고 심장이 철렁했다. 이 날이 올 줄은 알았는데, 진작에 알았는데, 그날이 오늘이 될 줄은 몰랐던 탓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띵했다. 하지만 슬퍼하기에는 너무 부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외출 중이었고, 친구들과 지인들과 함께였고, 왁자지껄 소란스러웠고, 정신이 없었기에, 당장 애도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부고 소식을 받은 날로부터 지금까지, 6년이란 시간 동안, 제대로 애도를 한 적이 없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예상된 것이었고 충격도 아니었으며, 1년 가깝게 병간호를 돌아가면서 한 할머니와 네 딸들은 알게 모르게 지쳤으며, 장례식에 온 사람들은 이 정도면 호상이라고 했다. 장례식을 앞두고 엄마는 내게 학기 중인데 굳이 한국까지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대학원 졸업과 취업 준비 등에 쫓기며, 나는 할아버지와의 이별 그리고 이별의 후폭풍 같은 단계들을 비껴갈 수 있었다.
그런데 1년에 한두 번씩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요새는 조금 더 자주 난다. 할아버지가 청량리역 근처 공원에 가서 비둘기 떼에게 쌀 모이를 던져주던 모습, 다방에서 내게 차인지 커피인지를 시켜주던 모습, 갈색 정장 바지에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을 신고 바닥에 벌렁 누워 어린 내게 비행기를 태워주던 모습, 이마 박치기 함 해보자 하면서 머리카락이 얼마 남지 않은 본인의 매끈한 이마와 내 작고 무른 이마를 맞대던 모습. 다 내가 어렸을 때의 모습들이다. 10대 때 할아버지와 교류한 장면들은 신기할 만큼 떠오르지 않는다. 내 가슴을 아리게 하는 건 이 모습들을 할아버지와 같이 회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 번도 회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장면 속 인물은 둘인데, 그중 한 명만이 홀로 남아 두 명 몫의 영사기를 돌린다.
친할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신다. 정확히 말하면, 간신히 살아계신다. 귀가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끼시고 치아가 다 빠져 틀니를 끼신다. 무릎 관절이 다 닳아서 거동이 불편하시고 치매에 걸려 할머니를 힘들게 하신다. 한평생 시골에서 밭을 갈며 사신 분이라 이승과의 작별 또한 한 줌 흙 위의 시들어가는 작물처럼 서서히 그리고 자연히 맞이하고 계신다.
친할아버지와의 추억은 분명 있지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몇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중에 기억나는 것은 꽤나 최근의 것인데, 한 3년 전 겨울에 잠시 한국을 들렸을 때다. 시골에 내려가 루틴대로 저녁밥을 먹고 그 다음날 아침에 산소에 갔는데 풀이 드세게 난 언덕을 오르내리는 바람에 내 신발과 바지 밑단에 도깨비바늘이 한가득 꽂혔다. 그걸 발견한 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바늘을 털어주셨다. 터는 걸로 안되자 안 그래도 침침한 두 눈을 찡그리고 안 그래도 구부정한 허리를 굽히고 한 올 한 올 바늘을 손으로 뽑으셨다. 귀한 손녀 옷에 흠이 가지 않게 흙이며 가시며 털어 없앴다. 나는 그때 할아버지가 나를 정말 아낀다고 느꼈다. 아껴야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상경하기 전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품에서 꼬깃한 흰 봉투를 꺼내 챙겨주셨다. 언제나 그랬듯, 섭섭지 않은 금액이었다. 시골에만 계시는 분이 어디서 이렇게 매번 돈이 나는지 의아할 정도의 그런 금액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엄마, 아빠가 할아버지께 드리는 용돈의 일부일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든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들 아쉽지 않게 항상 두둑이 돈 봉투를 마련해 놓으셨다. 아유, 너무 많이 주신 거 아니에요, 하면 멋쩍게 별 거 아니다, 하고 발그랗게 상기된 볼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는 대답했다.
이랬던 할아버지가 몇 년 사이에 성큼성큼 한 줌의 흙에 가까워지고 있다. 나는 아직 보여드릴 게 많은데, 의기양양하게 뱉어놓은 꿈들을 이룬 후 멋지게 금의환향 해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오래 기다려주지 않을 모양이다. 조금만 더, 몇 년만 더 버텨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는데 그런 마음이 들수록 어느 날 홀연히 돌아가실 것만 같다. 그래서 외할아버지 때처럼 다소 허무하게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든다. 그 허무함은 옅은 아쉬움이 되어 또 나를 한평생 따라다니겠지. 그 미련한 미련이 나의 짝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