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앞에 썼던 일기를 읽는게 재밌다.
내가 저 때 저런 생각을 했구나. 이런 감정을 느꼈구나.
또 내가 얼마나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지도 체감했다.
특히 바로 전 일기가 그렇다. 왜냐하면 남자친구는 아직 한국에 있고 우리의 사이는 현재 좋기 때문이다.
필라테스를 시작한지 두 달이 됐지만
체중은 왔다갔다하더니 최근 한 달 사이에 확 늘어서 (이유 있는 체중 증가, 군것질 과다) 이제 56키로를 육박한다.
피부는 언제나처럼 더럽고 2월에 새로 들어온 상사는 열정 만수르여서 덕분에 업무 스트레스는 배가 됐다.
코로나 상황이 좋아졌다고 짐바브웨에서 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이 날이 올 줄 진작 알았고, 한 번 쯤 갈 걸 각오하고 있었는데도 비행기 표 예매 버튼 위의 커서는 계속 갈팡질팡이다. 아무래도 나는 찐 '국제' 직원이 되기는 글렀나보다. 다른 핑계는 없다. 두렵다. 낯선 환경이.
이번에는 정말 연고도, 다른 한국인의 존재도 희박한 타지 오브 타지에 가서 몇 개월동안 혼자 살아나가야한다는 점이, 날 두렵게 만든다.
취준을 시작한지 어느덧 3개월차. 면접을 본 곳은 딱 한군데 - 페이스북이라는 정말 얼토당토 않은 곳 뿐이다. 물론 결과는 불합격.
미래에 대한 불안, 취준 스트레스, 국제기구 직원의 숙명은 내 머릿속을 너무 오래 맴돌아 이제 내 대뇌의 일부가 된 것 같다.
이런 각박하고 건조한 일상 속에 그나마 위안을 얻는 것은 할게 끊임없이 있고 시간이 빨리 간다는 점이다. 일, 취준 (원서 + 자격증 준비), 프랑스어 공부, 필라테스, 애인과 근근히 데이트, 이 루틴의 무한반복을 겪으면 자투리 시간이 거의 남게 되지 않는다.
사실 뻥이다. 12시 퇴근하고 거의 3시까지 안 자고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앙상블 연속이다.
아무튼, 외부에서 스트레스 한 스푼을 내 입에 강제로 털어넣지 않는 이상, 내 스스로의 잡생각과 내면적 갈등이 나를 괴롭히는 날은 거의 없다.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도, 인간관계에 대한 냉소적인 고찰도, 지난날의 후회도, 다 할 시간이 없다는 건 좋다. 정말로.
아 맞다, 성인쌤이랑 혜원쌤과 불어 스터디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딱 두 번 했는데 수다가 50프로였다. 공적으로 만난 이들과의 몇 년 째 지속되는 연이 신기하다. 오히려 학창 시절 친구들보다 이 둘이 더 편하다. 진로와 관심사가 비슷해서 그런가? 아니면 나의 망가진 모습을 많이 보여주지 않아서?
불어는 참 어렵다. 이 속도로 어느 세월에 마스터하나 싶다. R 발음은 죽어도 안된다. 스페인어보다 훨씬 복잡하다.
난 이렇게 나름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가끔씩은 진흙구덩이에 빠진 차가 풀악셀 밟아도 바퀴가 헛도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지만 뭐 별 수가 있나. 오늘은 뭐라도 하면서 살아가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