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25(일) 지로나, 캄프 노우
바르셀로나 근교 도시인 지로나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알함브라(‘Alhambra’의 외래어 표기법은 ‘알람브라’가 맞지만, 드라마 제목을 따라 알함브라로 쓴다)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보다 지로나에서 더 많은 신을 찍었다고 한다.
<왕좌의 게임> 배경이 된 곳이라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지로나는 중세 분위기를 강하게 풍긴다. 특히 성벽 위에서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면 주차해놓은 자동차와 사람들의 복장 말고는 모든 것이 중세시대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다. 소도시라 2~3시간이면 둘러볼 수 있고 고즈넉한 매력도 있어 조용히 사색하며 걷거나 쉬기 좋은 곳이다.
역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성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의 아름다운 전체 윤곽, 성과 조화를 이루는 정원보다도 망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작은 구멍에 더 눈길이 갔다. 길고 드높은 성벽과 함께 적을 막는 기능을 하는 감시용 구멍으로, 어느 성을 가든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는데도 자꾸 눈이 향했다.
모든 여행은 지금껏 살아왔던 시간과 경험의 영향력 아래 있다. 이 구멍에 눈이 갔던 건 십여 년 전 군대에서 경계근무를 섰던 기억이 있어서다. 나뿐만 아니라 같은 것을 본 대한민국 남자들이 떠올린 것도 대체로 비슷했을 것이다. 여름이면 방탄모 아래로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모기가 옷을 뚫고 살을 물어뜯던 그때의 기억.
겨울은 더 괴로웠다. 경계근무라는 말에는 계절적 특징이 들어있지 않지만 이 단어를 듣는 순간 군필자들은 4계절 중 자연스럽게 겨울을 떠올린다. 한국의 한여름보다 태양빛이 따가운 스페인의 8월. 느리게, 그리고 고요하게 사색하기 좋은 고성의 한가운데에서 하루 중 햇빛이 가장 강한 오후 3시에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순간을 떠올리게 되는 아이러니. 이 성에서 한국인은 나 혼자였으니 내게 등을 보였던 사람들이나 내 뒤를 따라왔던 인파 중 나와 같이 겨울을 상상해낸 사람은 없거나 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바르셀로나로 돌아가 간단히 저녁을 먹고 밤에는 예매해놓은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3일 만에 다시 캄프 노우를 찾았다.
여행자는 태세 전환이 빨라야 한다. 낮에는 고성을 거닐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어도 저녁에는 10만 명 가까이 들어차는 경기장에서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지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시간이 한정된 곳에서는 물리적 동선과 감정의 흐름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시시각각 변하는 장소에 맞춰 분위기에 빨리 녹아드는 여행자가 같은 시간을 더 즐겁게 보낼 수 있다.
양 극단을 여행하는 날이었다. FC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펼치는 축구 한 경기 볼 동안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작고 조용한 도시에서 낮 시간을 보낸 뒤 저녁에는 세계에서 제일 박진감 넘치는 축구를 보여주는 팀의 경기를 보는 일정이었다.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가 부상으로 빠졌지만 각 포지션에서 최고를 다투는 선수들이 즐비해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언젠가 다시 올 거라는 생각도 있으니까 괜찮다. ‘축알못’이 아니라면 메시에 루이스 수아레스까지 없어도 이 팀이 약한 팀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이날 있었던 2019-2020 첫 홈경기에서 FC 바르셀로나는 선제골을 내주고도 동점골과 역전골을 넣은 앙투안 그리에즈만을 앞세워 레알 베티스를 5-2로 크게 제압했다.
일찍부터 돌아다니느라 조금 피곤하기는 했지만 유럽에서 처음 본 축구경기의 여운을 좀 더 길게 가져가고 싶어 분위기 좋은 펍에서 일행들과 상그리아까지 마셨다. 라이브 밴드 공연까지 완벽에 가까운 하루였다.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정체되거나 뒤처지지 않고 발걸음이 가는 장소들로 잘 따라와 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