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26(월) 바르셀로나-발렌시아
바르셀로나를 떠나 발렌시아로 가는 열차를 오후 6시에 탈 예정이라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가기는 어려웠다. 한 번쯤 가본 익숙한 동네에 들러 여유 있게 점심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맡겨둔 짐을 찾은 뒤 기차역까지 갈 참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간 장소는 미리 찾아놓았던 고딕지구의 한 레스토랑이었다. 스페인 식당들이 점심 영업을 본격 시작하는 시간은 한국 직장인들이 점심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고도 남을 시점보다 느리다. 스페인에서 일주일을 보냈지만 식사 시간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짐을 챙기고 여유 있게 나왔지만 식당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어림잡아도 30명 이상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곳에 한국인 남자 2명만 앉아 있었다.
그리 신기하지는 않은 경험이다. 해외에서 한국인이 많이 가는 호텔에서 숙박을 하면 조식 시간에 가장 먼저 나오는 사람이 한국인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이야기를 수십 번도 들었다. 물론 난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직접 확인한 적은 없지만, 국내 호텔에서 묵을 때 느지막이 조식을 먹으러 가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건 나 혼자인데 다 먹고 객실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사람은 항상 여럿이었다. 느긋함이 몸에 배어있는 나는 내 나라에서 여행하면서도 내 나라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가끔 받곤 했다.
나보다 먼저 자리에 앉은 한국인 남자 2명의 테이블에 음식이 담긴 접시가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주문하기 전이거나 주문한 지 오래되지 않은 듯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둘 중 한 명은 4일 전 벙커에서 같이 야경을 보며 맥주와 와인을 함께 마셨던 사람이다. 우연히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눈 뒤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함께 온 동행인의 친구는 한 국내 기업의 네덜란드 지사에 다니는 직장인이었다. 친구를 만나러 잠시 왔다고 했다.
언제 한국으로 돌아올지 정해두지 않았다는 그는 유럽 생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혼자 하려 했던 식사를 셋이서 하게 됐고, 다가올 여행지에 대해 혼자 생각하는 시간 대신 내가 가본 적 없는 새로운 장소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을 갖는 시간이 됐다.
내 집 아파트 현관에서 나온 8월 19일 새벽부터 산티아고 순례길 이틀째가 될 9월 15일까지 거의 한 달에 가까운 일정을 다 확정하고 숙소와 교통편까지 다 예약해두고 왔지만, 큰 틀만 정해졌을 뿐 하루하루는 매일 예상할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여행의 의외성이 주는 재미다. 따지고 보면 직장인으로서의 삶도 그랬다. 어느 회사에 들어갈지만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어떤 경로로 어떤 회사에 들어갔든 직장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내 상상이나 선택 안에 머무는 법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차 한 잔까지 함께한 뒤에야 혼자가 됐고, 이번 여행 두 번째 지역인 발렌시아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하나라도 더 미리 알고 싶지만 결국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것들로 규정되는 것. 그래서 언제나 호기심과 상상력이 다하는 지점에서 여행은, 적어도 여행하고 싶은 마음은 멈춘다. 발렌시아에서는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