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인스럽게 여행할 수는 없을까?

190829(목) 발렌시아 예술과학단지, 발렌시아-그라나다

by 여행일기

전날 저녁까지 함께한 동행 3명 중 2명은 아침 일찍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남은 동행 1명과 점심을 먹었다. 주문도 어렵고 음식도 늦게 나와 처음 앉은 시간부터 식사가 끝날 때까지 3시간 30분이나 걸렸던 전날 저녁과 달리 점심식사를 위해 찾은 집은 주문에서 서빙까지 꽤나 일사불란했다. 발렌시아에서 갔던 식당 중 제일 비쌌지만 맛과 서비스 모두 좋았다.


다른 집들은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지만 빠에야는 생쌀을 얹은 상태로 조리를 시작한다는 웨이트리스의 설명을 듣고 나니 오래 걸리는 것도 이해가 됐다. 빠에야를 주문하면 항상 스타터를 곁들일 것인지 물어보는 것 역시 괜한 질문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먼저 시킨 익힌 깔라마리(오징어와 모양, 식감 모두 비슷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오징어보다는 몸집이 작은 것)가 담겨 나온 접시를 다 비운 뒤에야 빠에야가 나왔다.


‘빠에야의 본고장’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발렌시아에는 지역 특유의 빠에야가 있다. 한국에서 맛보기 힘든 토끼, 달팽이가 들어간다는 점이 차이였다. 이 가게의 특성인지, 아니면 발렌시아식 빠에야에는 늘 이런 (한국 기준으로) 괴상한 식재료가 들어가는지 모르겠지만 하루 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토마토를 뒤집어쓰고 어깨가 아프기 직전까지 빨간 쓰레기를 던져댄 것을 상기하면 특이한 경험 축에 들지도 않는 것 같아 거부감은 없었다. 어차피 특이하다는 것도 상대적 생각이다.


여행 오기 전 스페인 친구에게 물었을 때도 발렌시아에서는 다양한 스타일의 빠에야를 맛봐야 한다며 토끼와 달팽이가 들어간 것도 먹어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눈으로 봐도 닭고기와 별 차이가 없어 보여 하나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먹어보니 도전이라는 단어를 쓰기 미안한 맛, 이미 잘 알고 있는 맛이다. 빠에야 안에 같이 들어가 있는 닭고기나 오리고기보다 연했고, 역한 향도 없었다. 빠에야 안에 든 토끼고기에서 비린 맛이 난다는 이야기도 어느 블로그에서 본 적이 있는데, 우리가 선택한 집은 비싼 집이라 그런지 냄새를 잘 잡아냈다.


시각적으로도 토끼라는 걸 알아내기 어렵다. 쌀 위에 얹혀 있는 토끼와 닭, 오리를 구분하기 힘들어 직원에게 물어봤을 만큼 생김새가 대동소이했다. 달팽이는 크기만 작았을 뿐 맛과 모양 모두 소라나 고둥을 닮았다.

1.jpg 사진을 다시 보니 무엇이 토끼고기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 동행 1명까지 보내고 나자 오랜만에 온전히 혼자가 됐다. 두 달이 넘는 여행의 첫 날부터 혼자 밥을 먹었던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탓에 다음날부터 함께 시간을 보낼 동행을 구했던 것이 열흘 연속으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여기까지 와서 너무 한국말만 한 것 같아 잠시 혼자가 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후를 함께할 사람은 구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이번 여행의 목적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동행을 찾겠지만, 생각을 펼쳐놓거나 정리하려면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했다.


혼자 걷게 된 뒤 찾은 곳은 발렌시아 예술과학단지였다. 디자인이 참신한 건물들을 구시가지에서 조금 벗어난 지역에 집중적으로 지어 조성한 예술과학단지는 시민들의 쉼터 구실을 하고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수영장 같이 물을 채워놓은 곳이 여럿 보였고, 사람들은 음료를 마시며 물에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한다.


여행자들은 가끔 여행지에서 보는 현대적인 것들의 가치를 과소평가할 때가 있다. 예술과학단지 또한 그런 처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듯 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어디를 가든 그곳 또한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오히려 시민들이 일상의 시간을 보내는 이런 공간들이 도시의 참모습을 그대로 보기에 더 적합한 곳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는 관광은 멈춰있는 것들을 보는 것일 때가 많다. 물론 멈춰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과 영감을 주고 여행 동기를 부여하는 위대한 것들이 많지만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존재 - 대부분 ‘현지인’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객을 제외한 사람들 – 를 보며 내가 여행하고 있음을 더 자각하게 되는 순간도 많다. 인간은 결국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존재이기에, 거주자가 없으면 여행자라는 개념도 생길 수가 없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신경 쓰지 않았던 타인의 시선을 느끼게 되자 내가 외지인도 되지 못하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여행이 주는 특유의 나쁘지 않은 고독감에 빠르게 빠져들었다. 몇 시간 뒤 지금 있는 곳을 떠나야 할 때면 쉽게 찾아오는 감정이다.


한국인들도 이제 세계 어느 나라 국민들 못지않게 여행을 자주 다닌다. 여행이 생활이 되니 남들과 같은 여행에서 벗어나 ‘현지인처럼’ 여행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도대체 이 ‘현지인처럼’이라는 게 무엇일까? 낮에는 중국인 관광객 틈에 끼어 특이한 건물 하나 등지고 인증샷 찍기 바쁘게 보내놓고 저녁엔 허름한 식당에 들러 옆 테이블 사람과 무릎이 닿을락 말락 하는 공간에서 밥을 먹으면 현지인이 될 수 있는 걸까?


조금 냉정하게 말하면 ‘현지인처럼’ 여행하는 방법은 없다. 학생이 직장인처럼, 직장인이 학생처럼 보이고 싶은 순간들은 있겠지만, 학생은 학생이고 직장인은 직장인이다. 주경야독하며 두 가지 신분을 모두 가질 수도 있지만 엄청난 무게를 감내해야 한다.

2.jpg 살짝 멍을 때려주면 잠시 현지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여행하면 여행자고, 머무르며 생계를 꾸려나가야 현지인이 된다. 명확하고도 상반되는 이 두 가지 신분의 경계를 깨달을 때 오히려 여행이 즐거워지는 경험을 해본 사람도 많을 것이다. 어설프게 로컬 피플 따라하는 것보다 철저히 여행자의 눈으로 차이를 바라보는 것도 서울에 있지 않는 시간이 나에게 줄 수 있는 선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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