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30(금) 나스르 궁전 야간 관람
발렌시아에서 자정에 야간 버스를 타고 8시간여를 달려 그라나다로 왔다. 6시간 정도는 잠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도 앉아서 잔 잠이라 그런지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옛날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여행은 끊임없이 변하는 나를 발견해가는 과정이라는 말, 이런 상황에도 적용되는 말인가 싶다. 어쨌든 이른 아침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잠시 바에 들러 점심부터 맥주를 마시고 들어와 오후 3시부터 늦은 낮잠을 잤다.
스페인어로 ‘석류’라는 뜻을 갖고 있는 그라나다는 알함브라(스페인어에서는 ‘h’가 묵음이기 때문에 ‘알람브라’라고 하는 게 맞지만 여기서는 알함브라라고 하겠다.) 궁전으로 대표되는 곳이다. 오후 10시에 알함브라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나스르 궁전을 관람하기로 해 미리 사둔 식재료로 저녁을 대충 만들어 먹고 나왔다. 맛있는 타파스 바를 찾을 수도 있었지만 피곤해서 힘들겠다는 걸 버스에서 확실히 느꼈다. 관람시간 전까지 부지런히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계획을 수정하고 휴식을 늘렸다.
숙소가 있는 언덕에서 내려와 평지까지 간 뒤 버스를 타고 20분쯤 가서야 나사리 궁전 근처에 도착했다. 궁전 앞 정원에서부터 타레가의 기타 연주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으면서 천천히 걸으니 밤길 특유의 쓸쓸한 분위기, 높은 곳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야경과도 겹쳤다. 이곳의 추억이라는 게 누구의 추억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도시가 이슬람 왕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 가톨릭 왕국의 국토회복운동에 밀려 그라나다를 내준 뒤 “그라나다를 잃는 것보다 알함브라 궁전을 다시 볼 수 없게 된 것이 더 슬프다”라고 말했던 스페인 이슬람 왕국의 마지막 왕 보압딜의 추억인지, 궁전에 들른 타레가의 추억인지, 이 궁전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낸 한 이름 없는 이가 노년에 알함브라에서 머물렀던 자신의 젊은 날들을 돌아보는 것인지, 보압딜과 마찬가지로 그라나다와의 이별보다 알함브라와 멀어지는 것이 아쉬워 자꾸 뒤를 돌아보며 한 걸음씩 떼는 여행자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어떠한 해석이든 가능하다. 장소가 주는 분위기와 곡의 이미지는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궁전 내부는 낮에 보는 것만큼 잘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밤에 정원을 거닐면 잘 정돈된 아랍 스타일 정원 위로 뚫린 하늘에 걸려 있는 별들을 마주할 기회가 주어진다. 별이 워낙 선명해 대형 분수를 둘러싼 뾰족한 나무들마저도 별을 가리키는 초록색 화살표로 보일 정도다.
밤은 낮보다 궁전 내부를 잘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알함브라와 이 궁전에 얽힌 이야기들이 주는 쓸쓸한 분위기를 전면에 내세우는 일에는 낮보다 탁월하다. 그라나다에 이틀 이상 머문다면 낮과 밤의 다른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서라도 알함브라에 두 번 들르기를 권한다. 어느 여행지에서든 한 장소에서 낮과 밤을 모두 지내보는 것이 그 공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