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02(월) 론다-말라가
론다는 1박이면 충분했다. 휴대폰으로 다음 여행지인 말라가로 가는 티켓을 예매하려고 했지만 현장에서 구매해야 한다고 되어 있어 기차 시간보다 2시간 빠른 오전 11시에 론다역으로 갔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나서도 1시간 30분이나 남아 (스페인 기준으로) 이른 점심을 먹으러 잠시 시내에 다녀왔다.
스페인에는 일요일에 열지 않는 가게들이 많다. 전날 숙소 주인에게 추천받았지만 문이 닫혀 있어 가지 못했던 식당이 시내에 있었다. 자리에 앉았으나 주문을 받는 시간(12시)까지는 15분 정도 남아 있었다. 직원은 12시에 주문을 받겠다고 말했고, 12시가 되기 전까지 자리에서 쉬고 동료와 잡담을 하다 12시에 주문을 받았다. 나를 비롯해 미리 자리를 잡은 사람들 중 누구도 재촉하지 않고 1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스페인 사람들은 여유가 넘친다. 요즘은 한국도 조금씩 변하고 있지만, 손님이 들어와 10분이 넘었는데도 주문을 받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늦은 건 아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직원은 약속을 지키고 있다. 일하기로 한 시간에 일을 하는 것이다. 주문을 받아줄 것이라 기대하고 일찍 앉았든, 가던 길에 시간이 남아 조금 일찍 들어왔든 먼저 온 건 손님들이다. 12시 약속인데 11시 50분에 와놓고 정시에 온 사람에게 왜 늦었냐고 타박해선 안 된다.
스페인과 한국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큰 차이는 나이 든 서버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는 일을 어릴 때 잠깐 하는 알바 정도로 여긴다. 나이가 듦에 따라 하는 일에 차이가 있어야 하고, 나이에 어울리는 직업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암묵적으로 공유한다. 이러한 문화 속에 직업에 대한 편견을 학습하고 고착화한다. 나부터 그렇다. 편의점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일을 하고 있으면 당연히 점주이겠거니 생각하곤 했다.
잠시 얘기하다 말았던 스페인 사람들의 여유로 다시 주제를 돌리자면, 이 여유가 일하는 사람에게만 있지는 않다. 주문이 늦어져도, 음식이 빨리 나오지 않아도, 다 먹고 난 뒤 계산마저 더뎌도 손님들이 불평하지 않는다. 서비스 제공자들의 의식만 바뀐다고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되진 않는다. 소비자들의 의식이야말로 진정한 필요충분조건일 수 있다. 만약 스페인 손님들이 음식을 빨리 달라고 닦달했다면 일하는 사람들도 확실히 더 분주하게 움직였을 거다.
똑같은 유명 맛집이라도 스페인 식당들은 한국 식당들에 비해 테이블 회전율이 낮다. SBS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스페인에서 촬영하면 여기 사장들은 밤새 지적을 받아야 할 정도로 느리고 동선 자체도 비효율적이며, 주문과 다른 음식이 나오는 빈도도 잦다. 메뉴가 워낙 많으니 주문하지 않은 게 나오는 경우도 많을 수밖에. 백종원 대표가 스페인에 오면 메뉴를 2~3개만 남기고 다 없애버릴지도 모른다.
‘갑질 문화’와 ‘빨리빨리’가 익숙한 한국에서는 재촉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배불리 먹어 걷기 힘든데도 식당 테이블 회전율과 다음 손님까지 생각해서 얼른 나가 주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늘 손님이기만 할 수는 없다. 자신의 일터에서는 일하는 처지가 된다. 아주 촘촘하지는 않지만 사회 구성원들이 어느 정도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지도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스트레스도 사회적 비용이다.
생산성은 높지만 스트레스를 주고받으며 서로가 서로의 감정노동자 노릇을 하고 살아 사회적 비용이 높은 사회, 반대로 생산성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여유로운 태도로 서로에게 날 세우지 않는 사회 중 무엇이 낫다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적당한 선이라는 게 있는데 내가 살아본 한국과 잠시 다녀간 스페인 모두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지도 모른다.
잠시 생각하는 사이 나온 음식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특히 와인에 브랜디를 섞은 쉐리가 일품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미리 사둔 티켓으로 말라가에 갔다.
론다에서 점심을 먹기 전 복권 가게 앞에 줄이 꽤 길게 서 있던 것도 기억에 남아 있는 론다의 모습 중 하나다. 월요일 아침부터 한 가게 앞에 줄이 길어진 것이 보여 가까이 가보니 뜻밖에도 복권 판매점이었다. 여행자들에게 세속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스타일의 여행지가 아닌 론다에서조차 복권 파는 곳 앞에는 사람들이 아침부터 진을 치고 있다. 인간세상의 무서운 보편성이다. 내가 이곳에서 볼 것이라 기대했던 그림은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이곳의 꾸미지 않은 민낯인 것을.
이번에도 역시나 기억에 남는 건 이곳에 오기 전까진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다. 고작 복권방이나 들르려고 이베리아 반도까지 온 건 아니지만 인간은 기억의 강도와 지속시간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곳을 다녀와도 모두의 여행이 다 다른 것은 기억하고 싶은 것도, 실제로 기억하는 것도 다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