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03(화) 말라게타, 라로살레다
론다에서 기차로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말라가는 스페인 남부에서 제법 대도시라 할 만하다. 바다가 있고, 근교에 1~2박 하기 좋은 도시들도 여럿 있어 남부를 여행할 때 거점으로 삼기도 적당하다.
하루 전 오후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호텔 루프탑 바에서 야경을 봤던 동행들과 함께 알카사바, 히브랄파로 성을 본 뒤 마트에서 먹거리를 사서 말라게타 해변으로 갔다. 햇살이 뜨겁기로 유명한 스페인 남부, 9월이었음에도 한국에는 없는 따가운 햇볕이 우리가 사들고 온 술과 음료들을 데우고 있었다. 이에 대비해 마트에서 각얼음도 샀지만, 얼음은 플라스틱 컵에 담자마자 빠른 속도로 녹아 물이 됐다. 모래는 또 어찌나 뜨겁던지 맨발로 모래 위를 걷다가 너무 뜨거워 의도치 않게 뛸 수밖에 없었다. 발바닥이 1초 이상 모래에 닿아 있으면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유일한 해결책은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온몸을 물에 담그고 나오면 그나마 버틸 만했다.
그러나 물에서 노는 동안 휴대폰에 신경 쓰지 못하다가 또 한 번 놀라움을 경험했다. 전화기에 온도계 그림과 함께 온도를 낮춰야 한다는 메시지가 떴고, 한동안 작동이 되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의 이름난 소매치기들 사이에서도 무사히 지켜낸 폰인데 태양에 뺏기기 일보직전이었다. 얼음과 전화기를 함께 바지 주머니 속에 넣고 1~2분 문댄 뒤에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것도 한국에서는 한 번도 없던 일이다. 각얼음이 녹기 전에 술과 음료를 다 마시지 못하면 식어서 맛없게 마셔야만 했기에 생각지 않게 빠르게 물배를 채우기도 했다.
여행자들이 스페인에서 가장 더웠던 곳으로 세비야를 많이 꼽는데, 세비야는 말라가에서 20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기후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면 된다. 스페인에 시에스타라는 것이 왜 있는지, 사라지는 추세 속에서도 왜 세비야를 비롯한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는 유독 시에스타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됐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저녁 먹기 전에는 말라가 CF의 홈구장인 라로살레다(Estadio La Rosaleda)에도 잠깐 들렀다. 말라가 CF는 지금은 2부 리그 격인 세군다 디비시온에 있지만 한때는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는 팀이다. 2000년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하나인 뤼트 판 니스텔로이가 선수생활 막바지에 몸담았던 구단이기도 하다.
이 팀은 2000년대 이후 축구판에 뛰어든 중동 갑부들이 내놓은 오일머니의 수혜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몰락해버린 팀 사정을 반영하듯 개장 80년 가까이 된 경기장 여기저기 낡은 곳이 눈에 띈다. 이 팀 팬이라면 가장 슬프게 들릴 소식은 공식 매장에 들어갔는데 굿즈(goods)가 다른 팀보다 많이 싸다는 거다.
경기장 투어의 필수 코스인 라커룸 투어에서 또 놀랐다. 보통은 현재 뛰고 있는 선수들의 유니폼을 걸어놓는데, 말라가 CF는 과거 자신들과 대결을 펼친 팀에 속했던 스타들의 유니폼을 전시해놓았다. 여기서 페르난도 이에로, 라울 곤살레스, 파트리크 클라위버르트의 유니폼을 발견했을 때의 당혹감이란.
여행에서 몰락한 왕조의 유적이나 유물을 볼 기회는 많지만, 현존하는 조직의 쇠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단면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이곳에 몸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눈과 마음이 한 곳에 머무를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축구를 테마로 여행을 해도 보통 말라가까지 오는 케이스는 드문데, 순례길 걸으러 왔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보게 됐다. 오전부터 이래저래 색다른 경험이 많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