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신발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다

190908(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완다 메트로폴리타노

by 여행일기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와 함께 스페인을 대표하는 양대 도시다. 하지만 문화의 중심지 바르셀로나에 비해 볼거리는 부족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래서 나도 일정을 짤 때 바르셀로나는 7박이나 잡았지만 마드리드에서는 4박만 하기로 했다.


그중 하루는 온전히 축구장 투어에만 쏟기로 했다. 마드리드 연고 두 팀(레알 마드리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이 모두 강팀이라 두 팀의 홈구장 모두 가볼 가치가 있었다. 넉넉히 자고 점심도 푸짐하게 먹은 뒤 먼저 들른 곳은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이자 축구팬들의 성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Estadio Santiago Bernabéu)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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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축구팬이 아니더라도 마드리드에 온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르기도 하는 곳이다. 특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유벤투스로 이적하기 전에 호날두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은 한국 팬들도 많았다.


A매치(국가대표 경기) 기간이라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이 뛰는 경기는 볼 수 없었지만, 박물관과 경기장 투어만으로도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클럽’이라는 문구를 아무렇지 않게 내거는 레알 마드리드의 자부심은 허세가 아니다. 라이벌 팬들마저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세계 최고의 클럽들이 겨루는 UEFA 챔피언스리그 최다 우승 팀이 바로 이 팀이다.


가이드 없이 박물관과 경기장을 둘러보기만 하는 투어 가격이 25유로로, 우리 돈으로 3만 원이 훌쩍 넘는다. 국내에서는 꽤 괜찮은 좌석에 앉아 축구 한 경기를 보고 맥주도 마실 수 있는 금액이며, 말라가 CF의 홈구장 라로살레다(Estadio La Rosaleda)에서 직원이 설명하며 안내하는 투어(10유로)의 2.5배다. 그만큼 비싼 입장료지만 지불할 가치는 확실히 있다. 축구를 좋아해서 그런지 스페인에서 축구장 투어를 하며 돈이 아까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투어는 박물관에서 출발한다. 들어가자마자 지난 100년 동안 이 팀이 들어 올린 트로피들이 전시된 공간이 나오는데, 이곳을 자세히 보지 않고 지나가기만 해도 1분은 족히 걸릴 정도로 레알 마드리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정상에 올랐다. 앞서 레알 마드리드를 표현하는 여러 수식어 가운데 UEFA 챔피언스리그 최다 우승팀이라는 수식어를 선택해 소개했는데,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는 다른 층에 따로 전시했는데도 스페인 안에서 따낸 트로피(가끔 해외에서 받은 것도 있었지만)들만 보면서 지나가는 데 1분 이상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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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이 입었던 유니폼, 신었던 축구화, 찼던 공 등을 전시한 공간도 그냥 지나갈 수 없다. 특히 2001-2002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레버쿠젠과 1-1로 맞선 상황에서 지네딘 지단이 왼발 발리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릴 때 신었던 축구화도 전시되어 있어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국내에선 지단의 2002년이 월드컵 직전 한국과의 경기에서 다쳐 월드컵에서 죽을 쑨 해로 많이 기억되고 있지만 유럽축구 마니아라면 지단의 2002년을 프랑스 대표팀의 레블뢰(Les Bleus) 셔츠가 아닌 레알 마드리드의 아닌 하얀 사자군단 유니폼을 입었던 모습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작 대머리 사내 하나가 17년 전에 잠시 신었던 신발 하나에 마음을 빼앗겨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터치스크린에서는 팀을 거친 주요 선수들의 기록과 활약상이 나온다.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가 불명예 퇴진했던 울리 슈틸리케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적어도 선수로는 부정할 수 없는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다. 이 구간은 레알 마드리드에 대한 애정과 지식에 따라 소요 시간이 결정된다. 보통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수십 분이 지나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마지막은 선수들이 앉는 벤치, 그들이 누비는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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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는 투어 손님들이 경기장을 떠나기 전에 만끽할 수 있는 서비스를 하나 더 추가했다. 투어 손님들은 VR(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해 레알 마드리드 선수가 되는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우선 구단 버스 모양을 하고 있는 공간에 들어가 자리에 앉는다. 자리는 선수들이 앉는 의자처럼 편안하다. 사람이 모두 차면 실내가 어두워지고, 양쪽 창으로는 영상이 나온다. 경기장을 향해 출발하는 버스를 팬들이 에워싸고, 주변은 이들이 내는 함성으로 찬다. 5분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레알 마드리드 선수가 되는 즐거운 상상도 해볼 수 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투어를 마치고 나서 찾은 곳은 지역 라이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쓰는 완다 메트로폴리타노(Wanda Metropolitano)였다. 팀과 경기장의 역사가 레알 마드리드만큼 유서 깊지는 않지만 완다 메트로폴리타노는 최근에 완공된 신축구장이라는 특징이 있다. 현대식 구장이 풍기는 멋을 앞세우는 이 곳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어 팀의 역사도 매년 깊은 맛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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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장의 VR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와 다른 접근법으로 소비자를 공략한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그곳에서 뛰는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이 만든 역사를 활용해 팀의 일원이 되는 귀한 경험을 제공한다면, 완다 메트로폴리타노는 새 구장답게 이 구장에서 보는 축구경기가 얼마나 역동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완다 메트로폴리타노에서 내가 가장 놀랐던 곳은 바로 기자회견장이었다. 이 경기장에서는 2018-2019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벌어졌다. 결승전은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각국 매체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 이 경기장은 소극장보다 큰 기자회견실을 갖추고 있어 어떤 경기가 열린다 해도 자리가 없어 바닥에 앉아 기사를 작성할 일은 없을 것이다. 스포츠 기자로 일하면서 바닥에 앉은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아 이런 큰 기자회견장은 부럽기도 했다. 지금껏 가본 야구장, 축구장 등 모든 경기장을 통틀어 특정 구단이 홈으로 사용하는 구장에 딸린 기자회견장 가운데 가장 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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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나온 때는 7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다른 경기장을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념품점에 들러 구경을 하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사려고 했는데, 7시 정각이 되자 직원들이 서둘러 문을 닫고 있었다. 그래도 물건을 사러 손님이 들어오면 문 닫던 것도 멈추고 고객을 응대하는 것이 우리네 정서인데 스페인에서는 절대 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시도도 하지 않았다. 한국 기념품점이 아니라 어쩔 수 없다. 단념하는 속도가 빨라진 것을 보니 스페인 분위기에 완전히 적응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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