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가 자랑하는 프라도 미술관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와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불린다. 2018년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여행할 때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서 에르미타주에 방문했고, 이번에 프라도까지 갔으니 루브르만 가면 미술 애호가들의 꿈을 이루는 셈이 된다. 물론 내 꿈은 아니다. 루브르를 일부러 찾을 생각도 없고, 언젠가 파리에 갈 이유를 만들게 되면 그때는 한 번쯤 가보려 한다.
프라도의 소장품 중 상당 부분은 펠리페 4세 시대에 모은 작품들이다. 펠리페 4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으로 야기된 유전병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턱이 길었고, 심한 곱사등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유능하다는 평가는 얻지 못했다. 초상화를 그릴 때는 ‘합스부르크 립’으로 불리는 튀어나온 턱을 축소하는 과정이 필요해 궁정화가들이 애를 많이 겪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포토샵 같은 기술이다.
그래도 펠리페 4세가 후대에 공헌한 바를 꼽자면 어려서부터 왕족답게 예술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 신분까지 속이며 미술품 경매에 참여할 정도로 작품 모으기에 열을 올렸다는 점이다. 이것 역시 강산이 수십 번이나 변한 뒤 이곳을 찾을 30대 한국인 남성을 위해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펠리페 4세의 고상한 취미 덕분에 프라도 미술관이 더욱 빛을 얻어 미술에 문외한인 나조차 이곳을 찾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 바가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구단 뉴욕 양키스의 홈구장 양키스타디움을 흔히 '베이브 루스가 지은 집(The House That Ruth)'이라고 하는데, 펠리페 4세의 지분을 조금 과장하면 이 미술관을 펠리페 4세가 지은 집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펠리페 4세 때 스페인이 패권국 지위를 내려놓으며 영광의 시기도 끝났다는 평가가 많다. 그래서 펠리페 4세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스페인조차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스페인 왕이 스페인 수도를 넘어 전 유럽을 대표할 볼거리 중 하나를 만들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프라도 미술관에 오는 건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 같은 스페인 화가들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다. 나 역시 그랬다. 벨라스케스와 고야가 그림 안에 녹여 넣은 숨은 의미들, 화가들의 삶에 스며든 요소들이 작품에 미친 영향을 하나씩 찾다 보면 왜 이 미술관만 봐도 하루가 모자란다고 하는지 깨닫게 된다. 이들의 생애와 예술세계에 대해 상세히 다룬 책만 해도 이미 수백 권은 족히 될 테니 굳이 첨언할 필요는 없겠다.
미술관을 나온 뒤에는 스페인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일하는 지인을 만났다. 2011년 한 프로젝트에 참여해 알게 된 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스페인에 오게 되면서 다시 인연이 닿아 마드리드에서 만났다.
해외에서 사는 한국인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관점은 늘 흥미롭다. 우리가 철저한 자국민의 눈으로 한국을 볼 때, 이들은 두 개의 눈으로 한국을 본다. 어쩌면 외부의 시선이 조금은 섞인 눈이 한국을 좀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하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언급하기는 다소 껄끄러운 주제들도 있어 풀어놓기는 곤란하지만, 새로운 관점으로 생각해볼 기회가 되기도 했다.
마지막에 들른 식료품점에서도 마음 따뜻해지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스페인에 온 뒤 소매치기를 경계하느라 중요한 물건들을 한 곳에 넣은 힙색을 어깨에 두르고 다녔고, 그 힙색 끈에는 여러 축구장에서 사 모은 구단 배지들을 달고 다녔다. 가게에서 과일과 음료수를 고르고 계산대에 섰는데 계산원 아주머니가 계산은 않고 한참이나 자기 가방을 뒤지더니 갑자기 미안하다는 손짓을 했다. 내 가방 끈에 레알 마드리드 배지가 없는 것을 보고 자기가 갖고 있던 걸 하나 주려고 했는데 자기 가방을 찾아보니 없었던 거였다.
레알 마드리드 공식 매장은 시내에도 있어 구단 배지 구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처음 본 사람에게, 그것도 다시 볼 일이 거의 없을 외국인 관광객에게 베풀려 했던 호의 치고는 너무나도 황송했다. 조금만 일찍 만났다면 물건이라도 더 팔아줄 수 있었을 텐데 마드리드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라는 게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