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14(토) 생장삐에드뽀흐-론세스바예스
발목을 접질리면 다음날 더 붓는 건 상식이다. 다치는 순간 걱정했던 것도 순간의 통증보다 하루 뒤에 있을 변화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마를 틈 없이 소염제를 지속적으로 발라준 덕인지 일어났을 때 발목이 걱정만큼 부어 있지는 않았다. 조금 움직여보니 보호대를 착용하고 걸으면 걸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오르막, 내리막에서 발목이 흔들리면 생길 통증이었다.
알베르게 직원은 출발하는 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고 솔직히 조언해줬지만, 스포츠로 치면 개막전부터 벤치에만 앉아 있는 꼴이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이틀 걸으면 도착할 수비리까지는 숙소 예약까지 되어 있어서 조금 아파도 이틀은 걷고 나서 쉬고 싶었다.
숙소에서 주는 아침을 먹고 오전 7시 30분쯤 출발했다. 걷기 시작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내가 늦게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스페인에서는 해가 중천에 걸리기 전부터 더위의 피크 타임이 온다. 스페인 여행을 3주 넘게 했지만 오전 7시 이전에 나와서 걸어본 적은 거의 없었기에 생긴 시행착오다. 더없이 맑은 하늘은 사진 찍을 때만 좋다. 그 보기 좋은 경치를 보면서도 차라리 비가 좀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향기나 습도, 온도까지 찍히는 카메라가 있다면 산티아고 순례길이 지금만큼 붐비지는 않을 거다.
순례길을 걷다가 쉴 때는 길 중간보단 마을 안에 있는 바(bar, 스페인어로는 ‘바르’라고 발음하지만, 여기서도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발음을 택했다)에서 쉬는 것이 좋다. 식사와 휴식을 동시에 할 수 있어 시간도 아낄 수 있고, 돌 위에 앉는 것보다는 의자에 앉는 편이 회복에도 도움이 된다. 항상 지도로 위치를 파악하고, 휴식할 곳도 계획적으로 설정해야 시간이 지체되는 걸 막으면서 효율적으로 쉴 수 있다.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길에는 쉴 만한 바가 출발지로부터 7~8km(정확한 거리를 적을 수 없는 이유는 어느 숙소에 묵느냐에 따라 거리가 달라지기 때문) 떨어진 오리손에만 있다. 오리손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가는 17~18km 구간에는 바가 없다는 점도 첫날 트레킹을 힘들게 하는 요소다.
맛있는 음식은 언제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그러나 늘 그런 음식만 먹을 순 없는 법. 평범한 음식을 맛있게 즐기는 방법을 알아야 식사가 즐거워진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것 중 하나가 비범한 허기다. 오리손 바에서 만든 스패니시 오믈렛의 맛은 안에 들어가는 재료보다 가파른 언덕길에 더 큰 빚을 지고 있다.
오리손에서 잠시 쉬었다는 건 많아 봐야 고작 8km쯤 걸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앞으로 제대로 된 쉼터 없이 최소 17km를 더 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중간에 길을 잘못 들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그렇다.
오리손 이후의 길은 악명 높은 코스답게 모든 순례자들을 겸손하게 만들었다. 오전 7시 30분에 출발해 오후 3시 30분이 되어서야 예약해둔 공립 알베르게에 다다랐다. 한국을 떠나기 전 예약했던 곳인데, 예약할 때 홈페이지에서 봤던 하얀 건물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 들었던 안도감은 긴 악몽에서 벗어나 그게 꿈이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와 거의 같았다. 걷기 전보다 조금 더 절뚝였지만 꽁꽁 묶어둔 덕에 발목 상태도 최악은 아니었다.
걷는 동안 한국인을 지겹도록 만날 거라는 여러 사람들의 조언과 달리 생장에서는 한국 사람이 한 명밖에 안 보였다. 하지만 론세스바예스까지 가는 길에선 여럿 마주했다. 저녁은 숙소에서 만나 식사 때가 맞은 다른 한국인 2명과 함께했다. 가장 어렵다던 코스를 통과했으니 적어도 수비리까지는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