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먹지 못해 더 잊기 힘든 맛집

190917(화) 팜플로나

by 여행일기

한국을 떠났던 2019년 8월 19일부터 하루도 그냥 쉬기만 한 날은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보는 여러 도시에서 호기심은 단 한 번도 게으름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았다. 가는 도시마다 시간이 비교적 빡빡했던 것도 알찬 여행을 도왔다. 이렇게 휴식 없는 여행 끝에 온 피로는 3일 동안의 도보 이동 후 극에 달해 결국 휴식을 선택하게 했다.


하지만 휴식도 휴식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알베르게에서는 오전 8시~8시 30분에 체크아웃을 해야 한다. 휴식을 미리 결정했다면 사립 알베르게나 다른 형태의 숙소에서 2박을 하기로 했겠지만 연박이 불가능한 공립 알베르게에서 자게 되면서 이 도시를 떠나지 않는데도 오전 8시 30분에 문 밖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직원의 재촉 속에 전날 묵었던 100명이 넘는 순례객 중 꼴찌로 나갔고, 나를 보낸 직원이 곧바로 문을 닫는 것까지 봤다.


앞서 나와 걸음을 함께했던 남매 현주와 종민, 또 다른 일행인 다혜는 팜플로나에서부터 본격적인 동행을 시작했다. 다혜는 내가 론세스바예스에서 다른 한국인 2명과 밥을 먹을 때 혼자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 처음 보고 수비리, 팜플로나에서는 계속 저녁식사를 함께한 멤버였다. 현주와 종민이는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화장실 앞에서 처음 만나 인사한 뒤 길에서 우연히 계속 마주쳐 같이 걷게 된 케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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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이른 시간에 쫓겨난 넷은 새로 들어갈 숙소의 체크인 시간(오후 2시)까지 어디든 돌아다녀야 했다. 이게 휴식일을 휴식일답게 보내지 못했던 이유다. 아침부터 성당과 바, 시내를 오가며 걷느라 5000보 이상 걷지 않겠다던 다짐은 이미 오전에 무참히 깨졌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들렀던 장소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다는 ‘카페 이루냐’였다.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시차를 둔 헤밍웨이와의 만남은 많은 생각을 던져줬다. 그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인 노인 이름도 공교롭게 산티아고다.


헤밍웨이는 여행자들의 오랜 멘토다. 순례길 위에 발을 딛기 전 하루 머물렀던 깎아지른 절벽의 도시 론다도 헤밍웨이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곳이고, 이제는 방송에도 소개되며 한국 여행자들에게 친숙해지고 있는 쿠바 역시 마찬가지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가면 그가 자주 찾았다는 바가 여행자들을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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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누구보다 좋아했던 헤밍웨이가 감성적이고 통찰력 있으면서도 재치까지 갖춘 이야기꾼이라는 건 검증된 고전들이 말해준다. 온전히 헤밍웨이의 작품인지, 아니면 누가 지었는지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헤밍웨이가 쓴 것으로 믿고 있는 유명한 초단편소설 이야기도 유명하다.


하루는 헤밍웨이의 친구들이 헤밍웨이에게 여섯 단어로는 이야기를 지어낼 수 없을 거라며 내기를 제안했다. 이를 받아들인 헤밍웨이는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한 번도 안 신은 아기 신발 팝니다)’라는 여섯 단어 문장으로 슬픔을 자아냈다고 한다. 헤밍웨이가 지은 것이 확실하다는 증거가 없는 게 흠이지만, ‘헤밍웨이니까 가능했겠지’라는 생각은 충분히 합리적인 추론이다.


마치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대문장가 조식을 떠올리게 하는 순발력이기도 하다. 삼국지 속 영웅 조조의 아들로 유명한 조식은 제위에 오른 뒤 자신을 죽이려 한 형 조비 앞에서 ‘칠보시’를 지었다. 조비는 ‘형제’를 주제로 형제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게, 자신이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를 짓지 못하면 조식을 죽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었으나 조식은 조비를 울리는 시로 자신의 목숨까지 구했다.


기자 출신이면서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 외엔 나와 공통점이 없는 인물이지만, 쉬운 단어만으로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낸 헤밍웨이의 힘은 글 쓰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재능이다. 쓸 데 없는 단어를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이 좋은 작가의 필수 덕목이라고 믿었던 헤밍웨이는 그것이 바로 ‘작가의 레이더’이며, 위대한 작가라면 모두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고도 말한 바 있다.


넷이 같이 앉아 있었지만 대화에 끼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영문학을 전공하고도 소설보다 여행으로 헤밍웨이를 더 많이 만난 부끄러운 졸업생이지만, 세계 곳곳을 누비다 작가들이 시간을 보낸 장소에 들르면 나도 같은 곳에서 시간을 흘리는 게 소소한 재미를 준다. ‘헤밍웨이는 어느 자리에 어떤 자세로 앉아 어디를 바라봤을까?’, ‘그때 앉았던 의자는 지금도 있을까?’, ‘발목을 다치지 않았다면 아침에 떠났을 테니 여기에 올 일도 없었겠지?’ 따위의 시답잖은 질문들을 혼자서 던지며 친구들이 일어나자고 할 때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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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우리에게 큰 추억으로 남을 해프닝도 있었다. 숙소 근처에 있는 맛집을 찾아갔는데, 우리는 이 집이 주말에만 요리를 하는 집이라는 걸 모르고 갔다. 음료를 시키라는 주인의 말이 음료 먼저 시키라는 말인 줄 알고 호기롭게 와인과 맥주를 주문했으나 주인은 한참이 지나도 음식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음성 번역기를 돌려 “음식 주문은 언제?”라고 물었고 그제야 주인도 이날은 음식 주문을 받지 않는 날이라고 말해줬다. 스페인 바를 다니다 보면 주방을 운영하지 않고 술만 파는 날도 있는데, 이날이 그런 날이었다.


언어가 통하지는 않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이 초로의 스페인 사내는 한국 기준으로 저녁때가 훌쩍 지나서도 씹어 삼킬 무언가를 찾지 못하고 있던 우리에게 서비스로 과자를 내줬다. 진짜 식사는 시킨 술을 마시고 근처에 있는 다른 펍에서 했지만 식사를 한 곳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곳은 튀어나온 배만큼 유머감각이 넘쳤던 주인장이 앉아 있던 그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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