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18(수) 팜플로나-푸엔테라레이나
엄청난 폭우를 만났다. 스페인에서 직접 본 비 가운데 제일 무섭게 퍼부었다. 반팔 차림이 아니었는데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팔에 따가운 느낌마저 전했다. 우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우박을 맞아본 적이 없어서 확실히는 알지 못하지만 빗방울이 닿는 것과는 분명 달랐다.
챙겨둔 우의를 꺼내 입느라 잠시 멈추기도 했고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면서 매 걸음마다 움푹 파인 곳이 없는지 확인하며 내디뎌야 했기에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비가 이보다 더 세게 올 수는 없다는 판단 하에 비가 내린 뒤 처음 다다른 마을에서 거의 모든 순례자들이 쉬어갔다.
이들의 판단은 정확했다. 1시간 정도 쉬면서 체온을 끌어올리고 나자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고,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이 내리쬐면서 더워지기까지 했다. 우박 같은 비로 상징되는 힘든 시간이 준 보상은 달콤했다. 태양은 비가 머물던 자리에 쌍무지개를 가져다줬고,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이 광경을 즐겼다. 나 또한 그토록 선명한 쌍무지개를 본 건 처음이었다. 카메라에 제대로 담기지 않는 것이 아쉬웠지만 덕분에 눈으로 만끽하는 시간은 더 길었다.
후반전은 다시 더위와의 싸움이었다. 늦게 일어난 사람들은 비가 왔었단 것도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더워졌고, 물웅덩이가 생겼던 곳은 진흙으로 가득 찼다. ‘여왕의 다리’라는 뜻을 가진 목적지 푸엔테라레이나(Puente La Reina)까지 가는 길에 지나게 되는 ‘용서의 언덕’에서는 모두가 한 마음으로 쉬었다. 이번에도 목표로 했던 시간보다는 한참 늦게 숙소에 도착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매일 떠나야 하는 우리의 옷소매를 잡아끈 것은 호텔 겸 알베르게인 이 숙소가 14유로에 제공하는 저녁식사였다. 특급호텔은 아니지만 호텔답게 음식이 푸짐하면서도 정갈했고, 무엇보다 음식과 와인이 무제한이었다.
와인이 프랑스나 칠레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스페인 역시 와인의 나라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리오하(Rioja)’로 대표되는 스페인 와인은 내수 비중이 높다. 그래서 한국에서 흔히 보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게 이곳에서는 장점이 된다. 내수용이라 품질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다. 서울 레스토랑에선 한 잔에 만 원 이상 줘야 하는 와인도 여기선 한 병에 5유로 안팎이다.
와인을 양껏 마시며 흘려보낸 3시간은 우리를 팜플로나에서 24km쯤 떨어진 푸엔테라레이나라는 작은 마을에 하루 더 묶어놓았다. 쌍무지개가 뜰만큼 비가 거셌던 날에 개운하게 샤워한 뒤 맛보는 와인은 그야말로 몸을 녹여버리는 힘이 있다. 다시 걸을 수 있는 몸으로 돌아갈 시간을 번다는 핑계로 또 한 번 와인을 곁들인 저녁을 상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