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 깊었던 호주 생존왕과의 만남

190921(토) 에스테야-로스아르코스

by 여행일기

앞서 순례길에서는 일행끼리도 개인 스케줄이나 몸 상태에 따라 잠시 헤어졌다가 만나기도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숙소에서 같이 출발한 날 역시 마찬가지다. 3명이 함께 문 밖으로 나갔더라도 각자의 속도에 따라 간격은 생긴다. 이때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는다. 서로 연락처가 있으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떨어지면 중간에 들르는 바, 혹은 도착할 숙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에스테야에서 로스아르코스(Los Arcos)로 갈 때는 내가 초반에 뒤처졌다. 순례길에서는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노란색 화살표를 찾아 따라가면 된다. 새벽이라 화살표 하나를 못 보고 지나쳤고, 앞뒤로 사람이 보이지 않아 한참 뒤에야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맞는 길로 들어왔지만 앞사람과의 거리는 보이지 않을 만큼 벌어져 있었다. 어차피 갈 숙소는 미리 정해뒀으니 내 속도대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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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혼자 걷게 됐지만 이내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걷게 된다. 호주에서 온 50대 혹은 60대로 보이는 남자를 비롯해 여럿이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걸음을 함께했다.


로스아르코스로 가는 길은 미로 같았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산속으로 들어가 빠져나오면 순례길 공식 루트와 만나는 길이었다. 다시 말해 조금 더 험하지만 시간을 줄일 수 있는 길이었다.


화살표가 없는 길을 한동안 가야 했다. 지도를 보고 가야 했는데, 화살표 없는 갈림길마다 이 호주 아저씨가 내린 판단은 100% 정확했다. 내 길 가기도 바쁜 시간에 뒤따를 순례자들을 위해 나뭇가지를 꺾어 바닥에 화살표까지 만들어주고 가는 모습은 마치 개척자 같았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기 전인 시간에 비까지 내려 눈앞은 흐려지고 흙바닥은 미끄러웠다. 하지만 생존에 필요한 모든 기술과 임기응변까지 한 몸에 지닌 호주인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비가 오는데도 한 손엔 스마트폰을 들고 GPS로 현 위치를 파악했고, 넘어져서 손이 더러워지는 바람에 스마트폰 버튼까지 흙으로 뒤덮여 조작이 어려워지자 혀로 전화기를 핥아 흙을 제거하고 손등으로 조작하는 순발력까지 발휘했다.


호주인과 주변인들의 관계는 개척자와 추종자가 된 지 오래였다. 우리는 마침내 화살표를 찾아냈다. 이제 지도 대신 화살표만 보면 된다. 호주, 스웨덴, 한국에서 온 우리 셋은 신나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순간의 희열을 즐겼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온 마을에서 바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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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에서 나온 뒤부터는 갈림길도 없는 평지였다. 충실히 화살표를 따르며 걸은 다른 순례자들과 걸음을 나란히 하며 목적지 로스아르코스에 무사히 당도했다. 샤워와 빨래까지 마치고 순례자 메뉴를 즐기는 게 일상의 즐거움으로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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