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24(화) 로그로뇨-벤토사
여행 이야기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현지인’이다. 현지인의 환대는 여행에 대한 기대에 있어 큰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유명 관광지나 대도시를 벗어나 소도시나 작은 마을로 갈수록 현지인과 얽힌 따뜻한 경험에 대한 기대가 커진다.
로그로뇨를 떠나기 24시간 전만 하더라도 이름조차 몰랐던 벤토사(Ventosa). 어디에선가 일어나면 좋겠다고 상상했던 일이 벌어진 곳. 예상은 하지 못하지만 기대는 하는 그런 일이 있었던 곳이다.
로그로뇨에서 부르고스까지 5일 코스인 거리를 6일에 걸쳐 가기로 하면서부터 하루하루 소화해야 할 거리는 줄었다. 그럼에도 출발시간을 늦추지는 않아 벤토사에 도착한 시간도 빨랐다. 1시에 체크인을 시작하는 알베르게 주인이 차를 몰고 와 알베르게 문을 열기도 전에 우리는 현관 앞에서 그늘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씻고 미리 사둔 한국 라면으로 늦은 점심을 대충 해결한 뒤 자유시간을 가졌다.
방에서 한참 쉬고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까지 돌리고도 시간이 남아 숙소 뒤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올랐다. 전망대라고 부르기 민망할 작은 공간이었지만 어쨌든 마을 전경이 보이는 지점도 있었고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마을 주민이 햇볕에 말리려고 널어놓은 호두도 보였다. 바닥에 호두를 깔아놓은 장본인으로 보이는 노부부는 지나가는 순례객들을 붙잡고 호두를 한 알씩 까서 먹이기도 하고 까지 않은 호두 몇 알을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길을 걷다가도 나무에 열매가 열린 것을 보면 뭐든 따서 맛보려 하는 호기심 많은 성격 같은 승민이, 그리고 어딜 가든 가만히 있지 않는 부지런한 타입인 현주가 이미 노부부와 의사소통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와 보람이도 합류했고, 노부부는 우리를 집 근처로 안내했다.
울타리가 감싸고 있는 작은 공간 안에 큰 나무 몇 그루가 있는 그림. 그 안에서 할머니는 사과와 무화과 열매를 손수 따서 우리에게 맛보라고 권했다. 호두를 까주던 할아버지와 과일을 따주던 할머니는 처음 보는 사람이자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사람이었다.
난 첫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될 사람에게 살가운 말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왔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나 역시 다르게 살아왔다고 말 못 하겠다. 그 집단의 일원으로 충실히 살아왔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불친절하거나 거칠진 않았지만, 진짜 관계를 만드는 건 어쩌면 무용한 말들로 이뤄지는 대화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필요 없는 말을 보탠 기억은 거의 없다.
내일이면 떠날 장소에서, 다신 만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따뜻함은 일상에서 갖는 따뜻함보다 더 큰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다가온다. 답례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 미안함을 덜어주기 위해 웃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노부부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고, 말이 잘 통하지 않는데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화과 껍질 하나 야무지게 까지 못하는 날 보고 비웃는 건 분명 아니었다.
그 흔한 마트, 슈퍼마켓 하나 없어 알베르게 안에서 파는 식재료가 아니면 바에 가서 저녁을 사 먹어야만 하는 불편한 동네, 하루 머물고 가는 순례자보다 그냥 지나쳐버리는 순례자가 더 많은 이 마을을 스페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 중 하나로 만든 건 돈 주고 산다면 3000원어치도 되지 않을 과일 몇 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