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의 독특한 문화, 기부제

190926(목) 아소프라-그라뇽

by 여행일기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기부제’라는 독특한 시스템이 있다. 현지인들이 산 속이나 길이 펼쳐진 곳에서 파는 음료나 과일, 간단한 먹거리 등에는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다. 소비자가 원하는 만큼 돈을 쥐어주면 된다.


아소프라에서 약 22km 떨어진 그라뇽(Grañon)이란 곳에는 기부제로 운영되는 알베르게가 있다. 이곳 말고도 여기저기에 많지만 10년 전 순례길을 걷다가 그라뇽에서 따뜻한 기억을 갖고 돌아온 적 있다는 승민이의 추천으로 우리 모두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이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묵기로 결정했다.


설명대로 우리가 선택한 알베르게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매일 순례자들이 모두 모여 저녁식사를 만들어서 함께 먹고, 설거지와 뒷정리까지 마친 뒤에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으로 이동해 서로의 길을 축복해주는 시간을 갖는다. 미사도 당연히 있다.

KakaoTalk_20200923_161909479_02.jpg

사실 저녁은 실망스러웠다. 큰 통 안에 칠면조 다리 수십 개가 있는 걸 보고 저녁에 주는 것인 줄 알았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건 큰 통조림 깡통에서 덜어낸 참치와 토마토를 섞은 샐러드, 렌틸콩을 얹은 밥, 매 끼니마다 볼 수 있는 잘라놓은 바게트가 전부였다. 10년 전에는 칠면조 다리를 먹었다던 승민이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식사 뒤 시간들은 그래도 꽤나 가치 있었다. 기도 시간에 함께한 20여 명은 한 곳에 모여 기도문을 읽은 뒤 자기 왼편에 있는 사람에게 차례로 덕담을 건넸다. 내 왼쪽엔 아내와 함께 온 이탈리아 중년 남성이 있어 영어로 부부의 남은 순례길이 평안하기를 기원한다고 전했다. 모두가 손을 잡았고, 나가기 전 자리를 바꾸며 한 사람씩 차례로 서로를 안아주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난 신앙이 없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달되는 보편적 감정은 늘 충분한 울림을 가져다준다.

마음을 나눈 덕분인지 잠을 자러 올라와서도 서로에게 호의를 더 쉽게 보였다. 오른쪽 새끼발가락에 생긴 물집을 바늘로 터뜨리고 있는데 물집 크기가 꽤 큰 것을 안 파트리크가 와서 물집 치료 패드를 붙여줬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이탈리아 아저씨가 발가락끼리 마찰이 일어나는 걸 방지해주는 골무를 끼워줬다. 내 옆자리였던 다른 남자는 내게 걸으면서 쉴 때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환부를 햇빛으로 소독해주라는 조언까지 잊지 않았다.


벤토사에서 만난 노부부가 줬던 과일이 떠올랐다. 첫 만남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내주는 마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호의였다. 서울에서 나,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100% 순수한 호의를 베풀기도, 기대하기도 힘든 시간과 공간에 던져져 있었다. 누군가 내게 산티아고 순례길을 꼭 가봐야만 하는 이유를 하나만 대보라고 한다면, 일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온전히 순수한 호의를 단 한 번이라도 겪어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대화에도 재료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