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27(금) 그라뇽-벨로라도
보통은 한 번 만나고 마는 외국인들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하는 건 계속 마주쳐서다. 카르멘과 파트리크는 길 위에서 계속 만나게 됐다. 둘 다 우리 그룹을 좋아할 만한, 한국과의 연결고리도 있었다.
카르멘은 남편이 일 때문에 한국에 왔던 적이 있고, 본인도 머지않은 시기에 한국 여행을 할 계획이 있다고 했다. 이번이 5번째 순례길인 파트리크에게는 지난 순례길에서 인연을 맺은 한국인 여자 친구가 있다. 당연히 서울에도 와봤고, 다음엔 부산에 가겠다고 했다. 파트리크는 부르고스(Burgos)에 도착하면 같이 초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고, 카르멘은 벨로라도(Belorado)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카르멘의 제안을 들은 사람은 현주였다. 걷다가 우리 대열에서 잠시 떨어져 카르멘과 단 둘이 걸으며 대화하던 현주는 우리 의견은 묻지 못한 채 저녁을 같이 먹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은 건 벨로라도에 도착해 숙소에 들어간 뒤였다.
문제는 거의 모두가 우리끼리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는 점이다. 사실 아소프라에서 자리를 가졌을 때도 카르멘이 우리 그룹 전체와 활발하게 소통이 가능하진 않았다. 같이 앉아 있는 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대화가 어렵고 할 얘기도 특별히 없다는 게 전반적인 의견이었다.
가장 난감한 처지였던 건 중간에 낀 현주였다. 거절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 괴로워하던 현주는 결국 카르멘이 묵는 숙소 근처로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했다. 전해 들은 말에 따르면 카르멘은 결국 우리의 뜻을 받아들였고, (적어도 겉으로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의견을 낸 친구들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거다.
좋은 의도로 다가온 사람의 마음을 거절해야 할 때마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적당한 거리’에 대해 새롭게 고민해보게 된다. 모두와의 거리를 무조건 좁히려고만 했던 과거는 오래전에 지났고, 나도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변화가 주는 희열 이상으로 피로감을 계산에 먼저 넣는 성격으로 변했다.
이제는 누구를 만나든 적정거리를 생각한다. 선별적으로 거리 차이를 두는 건 타인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대부분의 일을 이성적으로 처리하고 싶은 나로서도 이것만큼은 이성보다 감정을 매번 따르게 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한국에 가면 다시 보기 힘들 사람보다는 연락과 만남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사람과의 시간을 선택하는 게 어떤 면에서 당연하기도 하다.
어쨌든 결론은 났고, 한국말만 해도 되는 저녁 자리가 펼쳐졌다. 보람이가 우리를 만나기 전에 같이 다니던 그룹에서 만났던 다른 한국인 순례자 몇 명도 왔고, 같은 숙소에 있던 한국인 모자도 함께했다. 1인 11유로에 순례자 메뉴를 주문하고 추가로 시킨 술은 한국인 모자 중 어머니가 흔쾌히 계산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나중에 계산서를 보니 추가로 주문한 와인과 맥주 가격이 빠져 있었다. 10명이 와서 100유로 넘게 음식을 주문한 것이 고마워서 술 몇 병 값을 일부러 빼줬다는 게 직원의 설명이었다. 한 턱 내겠다고 하신 분은 인심도 얻고 실리도 챙겼다.
식사 막바지에 깜짝 놀랄 일도 있어나 카르멘과의 에피소드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 우리가 간 식당은 한 알베르게에 딸린 레스토랑이었는데 마침 카르멘의 숙소가 그곳이었던 거다. 다소 어색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다시 반갑게 인사한 우리는 또 길 위에서 만나기로 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