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블록 위를 한참 걸어도 숙소가 나오지 않는 기쁨

190929(일) 산후안데오르테가-부르고스

by 여행일기

우리는 순례길 초반에 나오는 도시 팜플로나를 떠난 뒤부터 대도시를 그리워했다. 출발한 지 2주가 넘어가면 슬슬 필요한 물건이 생기거나, 쓰던 것들이 떨어져 사러 가야 한다. 하지만 순례길 중에 들르는 작은 마을에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들이 빠짐없이 있을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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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스는 팜플로나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대도시다. 팜플로나, 부르고스는 비교도 되지 않을 세계적인 대도시 서울에서 온 사람들도 부르고스가 가까워지는 걸 반긴다. 우리는 마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가 아니라 부르고스에 오기 위해 걷는 사람들 같았다. 한나절만 걸으면 부르고스에 닿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산후안데오르테가를 떠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다.


길에서 재미난 우연도 있었다. 영국식 영어를 쓰는, 50대쯤 돼 보이는 남자가 내게 말을 걸더니 이것저것 물었다. 몇 분 얘기를 나누면서 몇 가지 정보를 주고받게 된 뒤 남자는 자기가 쓴 책이 한국에도 있다며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국내 대형 서점 사진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베스트셀러 코너로 보이는 곳에 남자가 쓴 책이 표지가 보이게 진열되어 있었다. <내가 만난 1%의 사람들>이란 책이었고, 남자는 애덤 존슨이라는 유명 작가였다. 책 표지에는 심리학자라고 적혀있어 심리학자냐고 물었더니 존슨은 아니라며 자신은 작가라고 다시 한번 소개했다.


스페인에 오기 전부터 이번 여행에서 겪은 일들을 책으로 엮을 생각이 있었던 난 존슨과의 만남이 신기했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한국에 돌아간 뒤 연락을 주고받기로 하고 존슨의 이메일 주소를 받았다.


바위나 크고 작은 돌들이 깔린 길을 지나 보도블록이 보이는 곳으로 진입하면 숙소에 거의 다 왔다는 뜻이다. 보도블록 위를 걷고 횡단보도를 몇 차례 건넜는데 숙소가 나오지 않았다면 대도시다. 부르고스에서는 보도블록을 보고도 한참을 걸었으나 숙소에 도착하지 못했다.


세계 1, 2위 햄버거 체인 매장 간판도 실로 오랜만에 봤다. 보름이나 순례길을 걷다 노란색 ‘M’ 자, 그리고 햄버거의 왕을 상징하는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이 예쁘게 섞인 로고를 보니 경로를 이탈한 기분이었다. 다국적 기업에서 만든 흔한 정크푸드가 그리워질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패스트푸드점 햄버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 역시 착각일 수 있다. 요즘은 누가 나에 대해 물어도 잘 모르겠다고 답할 때가 많다.


햄버거보다는 휴식이 더 고파서 쉬지 않고 걸어 숙소를 눈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제대로 쉬고 싶으면 쉬면 안 된다는 게 아이러니지만, 자기 혹사도 습관이다. 잠시 회사원 시절의 기억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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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로뇨에서 만난 뒤로 계속 함께해온 보람이는 부르고스를 끝으로 순례길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최후의 만찬 장소는 부르고스 시내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순 없지만,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같이 먹은 메뉴를 보면 안다. 순례길 와서 처음으로 한 병에 18유로나 하는 비싼 와인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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