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조용히 지내지 못해 불안한 인간

190930(월) 부르고스

by 여행일기

부르고스에서는 연박하기로 미리 결정해둬서 굳이 일찍 잠들지 않아도 괜찮았다. 새벽에 일어날 필요도 당연히 없었다. 오랜만에 와이파이까지 잘 터져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기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없었다. 밀린 한국 소식도 몰아서 접했고 지인들과 오랜만에 연락하기도 편했다. 평소라면 알베르게에 도착해 샤워를 마쳤을 시간에 첫 끼를 뱃속에 집어넣기 시작했으니 대단한 게으름이었다.


부르고스는 카스티야이레온(Castilla y León) 지역의 대도시 중 하나로 관광객을 꽤나 많이 끄는 곳이다. 대성당 근처가 가이드 투어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늘 북적이는 이 도시에서 며칠이고 보낼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철학자 파스칼이 말했듯 인간은 혼자 방에서 고요히 시간을 보내는 법을 몰라 불행해지기도 하는 존재다. 무엇인지 설명하기 힘든 잡념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일상에서 쓰던 물건들이 없는 곳은 사색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의 물건들을 대체할 다른 물건을 찾게 만들기도 한다. 스마트폰은 내가 집에서 사용하는 많은 것들의 대체재가 될 수 있었고, 걷지 않아 24시간이 온전히 자유롭게 주어진 날에도 내가 어떤 사유의 핵심으로까지 들어가는 일을 방해했다.


생각이 필요할 땐 생각하는 데 필요한 습관들도 필요해진다. 제 발로 찾아온 여유도 맘껏 끌어안지 못하는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아무 일이 없어도 마음이 늘 분주하고 조급해 나를 둘러싼 많은 고민들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이번 여행이 절반 이상이나 흘렀다.

KakaoTalk_20201102_173150388_01.jpg

별 일 없이 지나갈 것 같던 조용한 날은 저녁을 먹으며 다시 순례길 준비 모드로 변했다. 친구들과 상의 끝에 부르고스에서 다음 대도시 레온(León)까지 180km에 이르는 구간을 걷는 대신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결정하면서 출발은 또 하루 미뤄졌다. 부르고스에 하루 더 머무르는 대신 5명이 탈 자전거를 구하고, 걸으면 7일 걸릴 거리를 자전거로 달려 3일 만에 가면 시간을 아낄 수 있다. 순례길 이후 여행을 좀 더 여유 있게 만들기 위한 결정이었다.

KakaoTalk_20201102_173150388.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보도블록 위를 한참 걸어도 숙소가 나오지 않는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