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같은 순례길 위의 운명

191005(토) 프로미스타

by 여행일기

숙박업소는 365일 열려 있을 거라는 생각도 산티아고 순례길에선 고정관념이다. 내가 묵던 알베르게가 쉬는 날이라 숙소를 옮겨야 했다. 주인 가브리엘이 맞은편 알베르게를 추천해줘 짐을 들고 간단히 길만 건너 다시 침대에 누웠다. 50m 정도 걸었을 뿐이긴 하지만 짐을 가지고도 조금은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10kg에 육박하는 큰 배낭을 메고 5분 이상 걷는 건 여전히 무리다. 오른발을 땅에 디딜 때마다 화가 났다.


짐만 없으면 하루 전보다 좀 낫겠다 싶었다. 오전은 쉬고 오후엔 좀 더 멀리, 좀 더 빨리 걸어보기로 했다. 알베르게 가까이 있는 산마르틴 성당까지 걸어갔다.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을 잘 보여주는 성당이라는 객관적 설명은 내겐 무의미했다. 이 성당은 내가 남은 기간 다른 지역에서 시내 관광이라도 할 수 있을지 여부를 답해줄 성지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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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걸음이 매일 조금씩 빨라지기는 한다. 두 걸음에 한 번씩 찾아오는 통증은 여전하지만 하루 더 자면 숙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기차역 정도는 배낭을 메고도 걸어볼 수 있겠다는 확신은 들었다.


결국 하루 뒤 기차로 레온까지 가기로 했다. 걸을 수 있다는 확신보다는 더는 여기에 누워만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게 작용한 결과다. 머문 시간만큼의 흔적은 남지 않을 테지만 예기치 않게 4박을 하게 된 작은 마을 프로미스타를 떠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숙소에서 주인이 쓰던 파란색 볼펜을 우연히 봤다. ‘해외여행보험 김해공항영업소’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 혹은 세상 어딘가에 있을 공장에서 태어난 볼펜이 김해공항으로 왔을 때, 누구도 이 볼펜이 언젠가 스페인 북부 시골 마을에서 숙박업을 하는 중년 남성의 손에 쥐어질 것이라 예상하지는 못했으리라. 문득 내가 바라보는 볼펜의 운명만큼이나 나의 이번 여행도 내다볼 수 없는 사건과 변수들의 연속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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