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하며 쌓인 피로에 미처 극복하지 못한 시차까지 겹쳐 실로 몇 달 만에 12시 이전에 자의로 잠자리에 들었다. 몬세라트, 타라고나, 시체스를 하루에 다 돌아보는 투어가 예정되어 있어 일찍 일어났고, 약속시간인 오전 7시 50분 전에 투어 버스가 출발하는 스페인광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몬세라트는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에도 좋은 곳이다. 관련 서적을 읽거나 가이드 투어를 하면 수도원과 기암괴석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가끔은 어떤 장소의 단면(보통은 사진)만 보고 여행할 곳을 덜컥 결정할 때도 있다. 그랬다가 후회했던 경우도 적지 않은데, 여행지를 몇 종류로 분류한 뒤 자기 성향에 맞는 장소를 선택하면 후회할 일이 줄어든다.
풀어 설명하자면 내가 사진 남기는 것을 좋아하는지, 지적 호기심이 많은 편인지, 액티비티를 선호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여행지 선택 단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뜻이다. 난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으면서 물을 무서워한다. 어느 도시를 가든 가고 싶은 곳과 아닌 곳이 명확히 구분된다. 몬세라트는 기대대로 이날 둘러본 곳들 중 가장 만족스러웠다.
잠시 왔다 떠나는 여행자가 혼자서는 다 조사하기 힘든 방대한 지식을 가이드 투어로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좋았고, 흔히 말하는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 거대한 바위들 앞에서 내가 작아지는 경험도 잠시 잊고 살았던 마음속 숭고함을 깨우는 계기가 됐다. 숭고함이란 감정은 종교의 유무를 뛰어넘는다.
몬세라트에서. 실질적인 첫날부터 좋은 기운을 받은 느낌.
중년 남성들이 특히 좋아할 것 같은 좋은 기운이라는 표현이 옛날엔 그냥 기분 따라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근거가 있는 소리다. 정말로 기운이 좋은 장소라는 게 있다. 세계에서 가장 기운이 좋은 곳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하는 미국 애리조나주 세도나(좋은 기운을 내뿜어 여행자들에게 치유와 영감을 제공하는 곳으로 명성을 얻은 관광지)가 그런 곳이다. 에너지가 강하게 소용돌이치는 볼텍스(vortex)라는 것이 지구에 21개밖에 없는데, 세도나에만 무려 4개가 몰려있다. 몬세라트 수도원 주변 광경도 얼핏 보면 붉은빛을 띠는 세도나의 암석과 색감, 모양이 유사해 괜히 내 삶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줄 곳 같다는 인상을 준다.
한 전직 대통령 때문에 우주의 기운이라는 말이 우스운 뉘앙스를 풍기게 되기도 했지만,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민식이 하정우를 만나 우주의 기운이 자신들을 감싸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을 볼 때와 비슷한 묘한 유쾌함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이번 여행에서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은 이유 없는 예감(실제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과 함께. 실질적인 여행 첫날이기도 해서 좋은 기운을 받은 듯한 기분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고대 로마 유적이 있지만 아직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타라고나, 한국영화와 인연이 꽤나 깊은 영화제로 유명한 휴양지 시체스까지 거쳐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을 땐 이미 긴장도 많이 풀려 있었다. 주위를 살피는 버릇은 여전했지만, 소매치기의 도시라는 명성에 압도되지는 않을 정도로 자신감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