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23(금) 바르셀로나 고딕지구
많은 곳을 여행해봤지만, 한국이 아닌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거의 없다. 한국과 비교하면 치안이 불안정하거나, 낙후되어 있거나,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거나, 일자리가 부족한 곳들이 세계 곳곳에 많다. ‘좋아하는 것이 많은 곳’보다는 ‘싫어하는 것이 적은 곳’이 거주지로는 더 적합하다고 믿는다. 물론 ‘한 달 살기’ 같은 일시적 거주라면 크게 관계가 없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편의시설 부족과 문화 결핍이다. 세계적인 대도시 서울에서 살다가 자연경관에 반해 어딘가에 정착했던 사람들도 영화 한 번 보기 힘든 곳에서 문화적 갈증을 느끼는 것을 종종 본다. 멀리 볼 필요 없이 제주도만 가도 영화관 가기가 힘들다. 자주 가지는 않지만 영화관을 예로 든 것은, 가장 보편적인 문화생활 공간이기 때문이다. 영화관이 없는 지역에 영화관보다 희귀한 다른 문화 관련 시설이 있긴 어렵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무엇을 원하든 부족함을 크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소매치기가 많다는 게 결정적 결함이기는 하지만,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인 만큼 문화적으로 풍성하다. 특히 문화의 다양성, 각종 공연의 다채로움이 문화, 예술에 있어 후발주자인 우리와는 큰 격차가 있다.
수도에 석회질이 많아 씻을 물이나 식수 확보가 한국보다 불편하고 소매치기가 많아 늘 소지품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수돗물이나 치안 같은 요소들은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보다 좋은 곳을 찾기 어렵다.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는 한 번쯤 살아봐도 괜찮을 만한 도시다. 일주일 다닌 게 전부면서 이렇게 쉽게 단언한다고? 200개 이상의 도시를 여행해본 지자체 공무원 출신이다. 3일만 지내보면 도시의 특성과 인프라가 필요한 만큼은 파악된다.
바르셀로나는 거리 물청소를 다른 유럽 대도시에 비해 자주 하는 덕에 유럽 거리에서 쉽게 풍기는 특유의 불쾌한 냄새가 적다고 한다. 추천할 이유가 하나 더 있는 셈이다. 살다 보면 서점에서 잠시 열어봤던 여행 가이드북 안에 있는 사진만 보고 여행할 곳을 덜컥 결정했다가 사진에 나오지 않는 것들로 인해 실망할 때도 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비교적 낮다.
다시 여행자의 시선으로 돌아온다. 어느 도시에나 대표 관광지는 다 있다. 대표 관광지가 주는 임팩트는 잠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좁은 골목길 하나하나에 얽힌 스토리,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면면이 여행의 재미와 도시의 인상을 결정하게 된다.
민낯에 가까운 바르셀로나의 내밀한 면을 찾고 있다면 고딕지구를 추천할 만하다. 고딕지구와 보른지구, 람블라스 거리를 걸으면 콜럼버스와 이사벨 여왕에서부터 가우디와 피카소, 그리고 이름 없는 수많은 카탈루냐인의 생애와 마주하게 된다.
무엇보다 깊게 각인됐던 것은 골목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건물의 움푹 파인 외벽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 민간인들을 벽에 세워두고 총을 난사한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너무 낮은 곳, 혹은 너무 높은 곳에 총알이 박혔던 흔적이 간혹 보인다. 어떤 것들은 스트레칭하듯 고개를 들어 올려봐야 보일 정도다. 쏘고 싶지 않았지만 명령이니 억지로 수행해야만 했기 때문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군필자의 합리적 추론이다.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이 떠오를 법한 벽이다.
지금은 가로등이 켜진 거리에서 아이들이 총알이 수백 개나 넘게 박혔던 벽에다 공을 차고, 가게 주인은 장사를 하고 소매치기는 여행객의 주머니를 턴다. 사연 없는 여행자 없듯 사연 없는 동네도 없지만 ‘대학살의 현장’이라는 건 어쩌면 외부인, 여행객의 시각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전히 아픔을 간직한 사람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저 이전 세대 때부터 살던 동네라서 그대로 살고 있을 뿐인 동네, 어떤 사람들에겐 그냥 '생활의 터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장소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토록 마음의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도 다른 듯 비슷했던 시간들이 있어서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