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 쇼펜하우어의 사주 명식 2

사주를 믿는다고? 유사과학의 함정과 나에게 있어 명리학의 의미 - 성찰

by 흔덕헌

16화 : 쇼펜하우어의 사주 명식 – 2

戊申年 甲寅月 己卯日 庚午時 로 보았을 때의 논명



사주를 믿는다고? 유사과학의 함정과 나에게 있어서의 ‘명리학’의 의미 - ‘성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한다.

나는 ‘사주명리학’을 공부하고 ‘주역(周易)’을 이해하려 애쓰며 ‘심리학’에서 그들 간의 공통점을 찾아보는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맹신하지 않으며, 어떤 한 편으로는 검증구조가 부재된 ‘유사과학’의 범주들에 대한 의심도 강한 사람이다.


나는 단순히 사주라는 틀을 넘어 인간이 왜 증명되지 않은 체계에 매료되는지 그 심리학적 매커니즘과 명확한 한계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뇌는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기에 유사과학은 그 빈틈을 파고들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내가 명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은, 이를 산명학(算命學)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내 삶의 상징체계, 즉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예측하거나 계산하는 데에 명리학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행과 계절에 따른 나의 삶의 자세를 살피는 데에 사용한다. 계절이 순리를 따라 흐르고 오행이 순환하는 방식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순조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나를 다듬고 되돌아보는 철학의 방향인 것이다.


사실 인간은 무질서한 현상 속에서 의미 있는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본능이 있다. 혈액형이나 MBTI를 통해 기질을 연결하는 흔한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연을 인과관계로 착각하는 것, 패턴 인식의 오류를 자주 범하는 것이 인간이다.

또 미래가 불안할 때, 유사과학이 제시하는 ‘설명 가능한 공식’은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위안을 주며 불안을 해소한다. 명리학의 방식들도 그런 부분이 많다.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하려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확증 편향’도 유사과학을 믿게 만드는 심리 기제다. 열 번 틀려도 한 번 맞으면 ‘이거 맞네!’라고 감탄하면서 신뢰를 강화하는 심리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나는 사주명리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내 생활에서도 많이 적용하며 살고 있다. 주위 사람들은 명리학에 빠져있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나에게 명리학이라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저 내 삶의 철학과 같은 핵심요소다. 인간의 삶을 위로하고, 일종의 분류를 통하여 상호 이해의 도구로 사용하는 ‘상징 체계’로서의 역할이면서,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 큰 관심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어인 것이다. 결국 ‘내가 누구인가?’의 근원적인 질문에 다다르는 인생의 과정에서 도반(道伴)같은 역할이다. 추명학(推命學)의 묘미는 ‘예언’이 아니라 ‘성찰’에 있다.



쇼펜하우어의 사주 명식, 그 두 번째 – 또 다른 해석과 같은 결론


‘추명(推命)’ 이라는 글자에는 ‘밀다’, ‘헤아리다’라는 능동적인 뜻이 담겨있다. 명리를 정해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의 에너지를 어디로 밀고 나갈지 결정하는 전략적 도구로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지난 브런치스토리의 연재에서 6화에 ‘쇼펜하우어’의 사주 명식을 살펴본 적이 있다. 사람을 혐오하면서도 굳이 사람이 많은 ‘잉글리셔 호프’를 자주 드나들었던 그. 헤겔을 향해 증오에 가까운 말을 퍼붓던 까칠한 독설가 쇼펜하우어.

지난 글에서는 그의 사주명식을 ‘을사일주’에 ‘임오시’라는 기준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사실 공식 역법은 시대와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고, 유명인의 명식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보통은 시주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명식을 찾을 때 주어지지 않은 부분을 추정하여 논명하는 경우도 있다. 또 명주의 출신위치에 따라서도 기준시가 달라져서 계산법이 다를 수 있다.


또 쇼펜하우어의 경우는 18세기의 인물로 그 시기의 역법은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이 혼용되어 사용되던 시기이므로 명식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다. 이번에는 ‘한국천문연구원’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변환 계산법을 활용하여 1788년 2월 22일(쇼펜하우어 프로필상의 생일) 그레고리력을 기준으로 하여 명식을 다시 한 번 풀어본다.


아마도 필자가 앞선 단락에서 언급한 ‘유사과학’ 이라던가 ‘확증 편향’의 이야기가 어떤 의미일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술사의 가치관이나 철학에 따라 한 사람의 이야기가 어떻게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지, 또 그것이 내담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가 있는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이렇게 설명한 것이나, 저렇게 설명한 것이나, 그 결론적 가치는 같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설계도’는 나와 있지만 그 설계도를 가는 길은 분명 ‘숙련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설계도를 해석하는 방식은 각자에게 다를 수 있다. 당연히 같은 것을 보더라도 ‘재물’에 중요도를 두는 사람과 ‘인성’에 중요도를 두는 사람은 그 평가가 갈리기 마련이다. 사실 그렇게 말하자면 가장 ‘중화(中和)’를 갖추어야 하는 사람들은 ‘활인(活人)’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일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사주명리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자다. 거기에 더하여 ‘고전’이 가진 철학을 사랑하고 실천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쇼펜하우어 명식 2 – 戊申年 甲寅月 己卯日 庚午時

새로운 명식으로 풀어본 쇼펜하우어의 삶, 논명하다


얼어붙은 대지 위의 불꽃

한겨울의 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초봄, 작은 전답인 기토(己土)로 태어난 명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형국이 처절하다. 월주를 장악한 갑인(甲寅) 정관의 거대한 거목들이 기토의 영양분을 사정없이 흡수하고(목다토붕), 일지의 묘목(卯木) 편관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일간의 뿌리를 찔러댄다. 이는 명리학적으로 신약(身弱) 사주이다. 나를 지켜줄 힘은 부족한데, 나를 규제하고 억압하는 '관살(官殺)'만 가득한 형국이다.

여기서 이 명주의 고통이 시작된다. 신약한 사주에 관살이 태과하면, 세상은 나에게 따뜻한 품이 아니라 언제 나를 공격할지 모르는 거대한 감옥과 같다. 그가 평생 느꼈던 "인생은 고통이다"라는 염세주의의 씨앗은 바로 이 '살중신경(殺重身輕)'의 위태로움에서 싹튼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용신은 오직 화(火), 즉 시지의 오화(午火) 뿐이었다. 강한 나무 기운을 태워 나를 생하게 하는 '살인상생’만이 그를 살리는 길이었고, 실제로 그는 평생을 학문과 고독한 사색이라는 화(火)의 기운 속에서만 비로소 안식을 찾았다.


상관견관(傷官見官)과 패격(敗格)의 독설

이 명식의 가장 치명적인 매력은 바로 상관견관의 구성에 있다. 연지의 신금(申) 상관은 지혜와 비판의 칼날이며, 월지의 인목(寅) 정관은 사회적 권위와 체면을 상징한다. 이 둘이 인신충(寅申沖)으로 정면 충돌한다.

명리학에서는 '상관견관이면 위화백단(禍百端)'이라 하여, 백 가지 재앙이 따른다고 한다. 격국론으로 보자면 정관격이 파괴된 패격(敗格)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 패격을 자신의 철학적 동력으로 삼았다.

당대 철학의 정점이자 '정관' 그 자체였던 헤겔을 향해 "사기꾼", "정신병자"라며 독설을 퍼부었던 것은 그가 가진 상관(申)의 기운이 정관(寅)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부모 자리에 일어난 인신충은 실제 삶에서 어머니 요한나와의 비극적인 결별로 나타났다. 아들을 계단 아래로 밀친 어머니와, "당신은 나의 이름 덕에 기억될 것"이라며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아들. 육친의 정을 끊어낸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나'라는 주체성뿐이었다.


무재(無財) 사주의 기막힌 재물운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질문에 봉착한다. "평생 일도 안 하고 독신으로 산 무재 사주가 어떻게 그토록 부유했는가?"

이것이 바로 명리의 오묘함이다. 겉으로 드러난 수(水, 재성) 기운은 없으나, 연지 신금(申)의 지장간 속에는 임수(壬水)가 암장되어 있다. 이를 '암재(暗財)'라 한다. 이 재물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는 실속 있는 자산을 뜻한다.

또한, 그는 정관격의 엄격함을 재산 관리에 쏟아 부었다. 은행 파산 위기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 원금을 회수했던 그 지독함은, 나를 지키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상관제살의 발현이었다. 재성이 없기에 오히려 돈에 대해 결벽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고, 시지의 오화(문서)를 통해 그 재산을 안전한 자산(이자, 채권)으로 묶어두었다.

그는 배우자(재성)도, 자식(관성)도 없는 고독한 명조였으나,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자신의 재산을 오로지 자신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육친의 빈자리가 경제적 자유로 채워진 셈이다.


고독한 수호자, 오화(午火)의 귀결

쇼펜하우어의 말년은 시주의 경오(庚午)다. 날카로운 상관(庚)의 비판은 여전하지만, 그 아래를 받쳐주는 따뜻한 오화(午) 편인이 그를 위로한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전 재산을 '군인 구제 기금'에 기부했다. 평생 세상을 저주하고 사람들을 멀리했던 독설가가, 결국은 사회의 질서를 지키다 희생된 이들을 위해 자신의 마지막 유산을 남긴 것이다. 이는 명식의 관살을 인성으로 승화시킨 완벽한 살인상생의 마침표였다.

가족에게는 단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오직 자신의 반려견과 하녀, 그리고 국가의 이름 없는 영웅들에게 재산을 나눈 그의 행보는 명리학적으로 보면 지극히 '쇼펜하우어다운' 선택이었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명식은 격국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격이 깨진 모습이다. 어쩌면 이 지점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격이 깨진 '패격'의 사주일지라도, 그 에너지를 어디로 분출하느냐에 따라 위대한 창조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신약함을 고독으로 방어했고, 상관견관의 날카로움을 철학적 통찰로 승화시켰으며, 무재의 결핍을 치밀한 자산 관리로 극복했다. 그는 명리에 갇힌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식을 가장 치열하게 살아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6화에서 소개한 쇼펜하우어의 명식을 또 다른 일주와 시주로 풀어보았다. 둘 중 어느 것이 실제 그의 명식일지 모른다. (어쩌면 실제로는 다른 글자로 이루어 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명리학이라는 학문은 이렇게 ‘여러 가지의 삶의 길들을 살펴보며 나를 돌아보는 학문’이 정확한 정의라고 본다.


내가 이 명식에서 배워야 할 것, 멀리해야 할 것, 그리고 이들을 통해 나에게 주어진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맞고 틀리고를 따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울 것과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과정인 것이다. 오늘도 나는 한걸음씩 어른이 된다.


2026년 2월 15일, 흔덕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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