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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Dec 17. 2021

찌질함의 역사



그러니까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인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충청북도 어디 아주 작은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갔다. 발령을 받은 아빠를 따라 터를 옮긴 곳은 외딴 언덕 위에 사원 아파트 여덟 동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좀 뭔가 주변 풍경에 생뚱맞은 느낌이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1년 더 다니다가 이사를 했다. 


이번엔 발령이 아니라 아빠의 희망퇴직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말리고 말렸지만 끝내 막지 못했던 보증으로 우리의 빚이 아닌 아빠 누나 그러니까 고모. 그 고모 남편의 사업자금, 그리하여 은행으로 넘어가버린 그 빚더미를 IMF 때 받은 아빠의 퇴직금으로 억울하다 소리도 못 내고 다 갚아야 했다. 


고작 14살 그쯤이었어서 자세한 건 모르고(싶었고) 그 지겹고 우울한 돈 이야기를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난 이때부터 꽤나 인생이 섧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빠 엄마에게 닥친 현실적인 문제들을 마주하며 조용히 내 세계를 확장시키는 일이었다. 그렇게 내 세계를 확장시켜야 평범하게 살아가는 다 비슷비슷한 모습을 지나 불행해지려면 참 다양한 이유로도 충분히 불행해질 수 있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침몰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본능적으로 알게 된 어떤 것이었다. 



전학 후 정말 지질한 중학교 생활을 보냈다. 지질했어서 그랬던 건지 이사와 다니던 중학교의 기억은 거의 없다. 단지 좋았던 건 학교에 도서관이 있었다는 것, 그곳에 가면 친구들에게 내 사는 사정을 들키게 될까 봐 조심하며 말을 할 필요도 없었고 학교를 나서면 볼 수 없는 책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모르겠지만, 아파트 입구에 비디오와 책을 빌려주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는데 난 거의 하루 걸러 들락거리며 없는 용돈에서 삼백 원 오백 원을 천 원 이천 원을 써가며 책을 빌려 보았다. 


세상에나, 이런 세상이 있다는 거야 정말? 세상에나, 이런 사랑도 있는 거야? 나는 책 속에서 세상을 배우고 사랑을 배웠다. 정말 우스갯소리로 하는 것처럼 글로 그 중요한 것들을 배운 것이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들을 부모로부터 배우면 정말 좋겠지만, 그것들이 궁금해질 때쯤 나를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십 대 청소년이 부모님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성장 드라마 속 주인공은 현실에 없어 보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 아이들도 마찬가지겠지.) 



아, 지금 생각해보니 처음은 초등학교 때부터였다. 사원아파트 관리동 2층에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아마 아파트에서 관리하는 곳으로 아줌마들이 자원봉사를 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도서관이 열리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관리소에서 도서관 열쇠를 얻어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실컷 책을 빼 봤었다. 그때 읽은 비밀의 화원 장면은 아직도 순간순간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게 정확하게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궁금했다. 내 밑바닥에 깔려 있는 어떤 정서나 기질이. 시간 나면 도서관 자료실에서 멍하니 앉아있고 서점에서 책을 만져보고 그래야 좀 내가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 생일 선물은 아빠랑 서점에 가 책을 고르는 거였다. 그렇다고 집에 늘 책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내가 책을 좋아해 부모님께서 때때마다 알아서 전집을 사주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내 존재를 위로받는 방법을. 그래서 자주 썼고 자주 뭐라도 읽었던 것 같다. 내 세계가 흔들릴 땐 더욱 그랬다.


결국 내 취향은 지질함 속에서 시작된 것이었나. 그래도 다행이다. 그럴 때 내가 찾은 게 책이었고 음악이어서. 사람으로 위로받으며 컸으면 좋았겠지만 우리는 다 저마다의 이유로 상처를 주기는 쉽고 위로를 주고받긴 어려우니 그렇지 못했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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