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쓰는 아이에게 ‘절대’의 기준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장소나 기분에 따라 훈육의 기준이 너그러워졌다가 엄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절대’라는 건 살면서 때론 얼마나 사람을 막막하고 외롭게 하는가. 까지 생각이 닿았다.
아파도 절대 결석은 안된다는 말에 초중고 12년 개근을 했다.
숨 막혀 미쳐버릴 것 같던 첫 사회생활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절대’라는 기준에 길들여진 나는 퇴근 후 매일 울면서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 않은 듯 일어나 꾸역꾸역 출근을 했다. '지금 이것조차 못한다면' 늘 듣고 커왔던 그 말이, 그런 생각이 나를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외롭게 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부모님 중 한 분은 나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셨고 한분은 나에 대해 너무 관심이 많으셨다. 한쪽이 방관자였다면 한쪽은 감시자였다. 그래서 혼자 스스로 알아서 발을 딛고 서야 했다. 어느 한쪽도 완전하게 의지할 수 없었기에.
때론 나와는 ‘절대’ 무관할 것 같았던 일들은 ‘절대’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겪었고 그때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위로했던 사실은 삶에서 결코 '절대’라는 법칙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어도 괜찮은, 그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은, 그곳이 아니어도 괜찮은, 아니 그렇기에 더 좋은 삶을 만날 수도 있다는 걸 엄마가 된 나는 내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다. 내가 너무 늦게 알아 외로웠고 지쳤었으니까.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 놀랐니? 힘들었겠구나.
지나갈 거야. 지금은 좀 쉬어도 돼.
엄마가 언제나 네 곁에 있어.
어쩌면 내가 크면서 듣고 싶었던 말. 그걸 내 아이에게 해주는 일이 육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