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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Nov 30. 2021

엄마의 서재

Do Not Disturb!


 우리 집엔 '엄마방'이 있다. 책상이 있고 편하게 무엇이든 읽을 수 있는 폭신한 소파가 있고 내가 읽은 책과 앞으로 읽을 책들로 채워진 책장이 있는 방이다. '엄마의 서재'라는 명목 하에 만들어둔 이 공간은 부엌에 서서 설거지를 하다가도 보이고 된장찌개를 끓이다가도 바로 보이는 그 방이다. 

 생각해보면 결혼 후 내가 사는 집엔 언제나 이런 공간이 있었다. 물론 식탁 따로 책상 따로 들일 공간이 허락되질 않던 작은 집에서 책상은 식탁이 됐다가 식탁은 책상이 됐다가 했고 정체성이 애매모호하던 테이블은 이제야 책상으로 제자리를 잡았지만 말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고 생긴 '엄마방'이라고 불리는 이 방엔 사실 커튼은 필요가 없었는데 그저 내 욕심으로 하얀 리넨 커튼을 주문해 달았고 지금껏 옷을 접어 뒀던 책장에 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책을 꽂아두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 책꽂이의 반은 물려받은 아이의 책으로 가득하게 됐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 방은 남편과 아이에게 내 방, 내 서재, 엄마방으로 통한다.






 그런데 이 방의 주인은 정작 방에 들어와 보내는 시간이 없다. 코앞에 있는 부엌에서 종종 거리다 보면 하루는 정신없이 흘러가고 이 방은 그저 방치된다. 청소를 할 때 들어오고 필요한 책을 찾을 때 들어오고 하루에 한두 번 아주 잠깐 들어왔다 머무는 정 같은 건 없이 바로 나가게 된다.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면 될 일인데 노트북을 들고 나와 아예 부엌 식탁에 앉아 모니터를 열고 앉는다. 언제든 내가 필요한 현장(부엌이나 거실)에 바로 투입할 전투태세를 갖추기 위함이다.


 그러다 아이 재우고 남편도 잠들거나 티브이를 볼 때 그제야 하루 종일 조용히 방치된 내 방에 들어와 앉아 본다. 마구잡이로 쌓아둔 책, 미쳐 정리하지 못한 것들을 뒤로하고 소파에 몸을 깊숙하게 던져 놓는다. 즐겨 듣는 노래를 낮게 틀고 낮에 잠깐 펼쳐봤던 책, 어제 읽다가 덮어 뒀던 책, 며칠 째 제자리인 책, 그런 책을 골라 천천히 읽는다. 그럼 그때부터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고 열두 시가 넘어 한시가 가까워지면 마음속으로 초조함이 째깍째깍 소리를 낸다. '지금 자야 내일 후회하지 않을 거야. 얼른 책 덮고 자.'

(육아의 오분은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지고 육퇴의 한 시간은 오분처럼 쌩- 그저 스쳐 지나가버린다!)


 언제쯤 밤이 깊어지는 게 아쉬워 초조해하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날이 오면 이런 즐거움이 크게 느껴지지 않겠지.


 늦은 밤에만 들어가는 내 방, 늦은 밤에만 들어갈 수 있는 내 방.

다른 중요한 일 미뤄두고 그 어떤 것보다 내 일이 먼저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와 이른 아침에도, 환한 낮에도 들어가 맘껏 즐기고 싶다! Do Not Distur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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