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과생의 글쓰기는 로맨틱하지 않았지

그래도 결국엔 사랑에 이른 이야기

by 클로드


나의 장래 희망에 문과 쪽 직업은 없었다. 진지하게 진로를 탐색면서부터 오로지 이과 직진이었다. 그렇게 지금의 회사에 다다랐고, 14년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렇게만 쭉 갈 줄 알았다. 작가라는 새로운 꿈이 들어오기 전 까지는.




대체 내 삶에 '글쓰기'라는 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이었을까?


기억나는 그 처음은 고등학교 때 일이다. 지역에서 주최하는 독후감 대회가 있었고, 내 글이 선정되어 도서관 책자에 실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숙제로 익숙하게 써오던 독후감이었기에 그 글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책에 실려본다는 건 생경한 경험이었다. 지금의 나였다면 기뻐 소리칠 텐데, 당시에는 살짝 좋아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교양 필수 과목으로 글쓰기 수업을 하나 들어야 했다. 사실 생각만 해도 너무 싫어서 미뤘던 수업이다. 흥미도 없고, 진로와도 상관없는 수업을 듣는다는 게 지루하게 느껴졌고, 내 안의 무언가를 꺼내놓는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수업 어느 날, 교수님은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을 보여주시며 그림에 대해 글을 써보게 하셨다. 나는 이과생답게 바람의 방향, 양산의 방향, 표정 없는 여인 등 그림 속 요소를 분석했다. 그리고 여인이 등지고 있는 것과 맞서고 있는 것에 대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보았다. 그 과정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모네의 이름을 딴 필명으로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그 수업은 내게 데자뷔 같은 시간이었는지도.

글쓰기 수업의 마지막 과제는 <나에 대한 글쓰기>였다. 이때 나는 타인에게 화를 표현하는 것에 대한 글을 썼다. 매번 화를 꾹 참고 삭이기만 하던 나를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글로 토로해 본 첫 기억. 레포트로 시작된 일이었는데 쓰고 나니 너무나 소중한 글이 되어버렸다. 교수님과의 면담 날 그 파일을 꼭 안고 갔던 그 마음이 떠오른다.


그 후의 글쓰기는 뜻밖의 장소에서 만났다. 토플학원의 라이팅 수업 시간. 대학 시절 나는 훗날 유학이 가고 싶어질까 봐 방학 동안 토플 공부를 했다. 에세이 라이팅을 배웠는데 주어진 주제에 대해 구조를 짜고, 논리를 갖춘 글을 영어로 썼다.

처음으로 내 글을 첨삭받던 시간, 여느 학생처럼 앞에 나가 화이트보드에 글을 옮겨 적었다. 나름 고민하고 성실히 해온 과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OOO 씨, 아직도 이렇게 써오면 안 되죠!"

정말 정확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매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뒤에 교복 입은 학생도 있었는데... 너무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나는 칼을 가는 마음으로 수업 내용을 내 글에 촘촘히 적용시켰다. 한 단어도 허투루 쓰지 않고, 논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글을 견고히 세우는 훈련을 했다.

어느 날, 선생님은 내 글 앞에 온화하게 웃어주셨다.

"이렇게 써야죠~ 이 반에서 제일 잘 썼어요."


토플 라이팅의 성장이 무색하게도, 나는 유학의 꿈을 키우지 않았고 토플 시험도 치러보지 않았다. 하지만 영어 글쓰기는 국내 대학원에 다니면서 제법 요긴하게 쓰였다. 내가 하고 있는 연구에 대한 반 페이지 분량의 짧은 영어 요약본, abstract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학기마다 쓸 일이 있었는데, 쓰고 나면 지도 교수님이 빨간펜으로 첨삭을 해주신다. 동그라미와 사선이 그어진 피드백을 받으면 고치는 작업을 이어가곤 한다. 그런데 내 페이퍼는 깨끗한 상태로 돌아왔다. "good"이라는 붉은 글씨와 함께. 그때 교수님의 미소도 토플 선생님의 미소와 비슷했던 것 같다. 이때만 해도 내가 글을 잘 써서라기 보다는 틀린 곳이 없었다는 만족감만 가졌다.


그랬던 내 글쓰기에 대해 정말 '글'에 대한 첫 칭찬을 인지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취업 자소서였다. 단 번에 취업문을 뚫은 내게 몇몇 교수님들께서 자소서를 보고 싶다고 하셨다. 지도하는 학생들에게 힌트를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대단한 스펙이나 언변을 늘어놓은 게 아닌, 그저 소신으로 채운 글이었다. 내가 왜 이 회사에 가고 싶은지, 이곳과 나는 어떤 면에서 어울리는지 고찰하며 썼다.

그런데 교수님이 내 자소서에 감명 받았다고 하셨다. 볼 때마다, 심지어 졸업 후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자소서 이야기를 꺼내시곤 했다. 그제야 나는 내 글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글에 담긴 내 소신이 괜찮았구나, 그걸 표현한 문장이 괜찮았구나. 읽을만한 글이었구나 하고 말이다.




이과생 나에게 글쓰기는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필요도 흥미도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글 쓰는 부캐를 키워가면서 과거를 돌아보니, 없다고 생각한 곳에 글쓰기가 함께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배우고 있었고, 펼쳐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하고 줄곧 일기를 써오고... 하는 레퍼토리는 내게 없다. 대신 조금은 다른, 다소 딱딱한 마주침들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의미 없이 스쳐가는 바람이 아니었나 보다. 그냥 지나가는 수업이 아니었고, 제출하면 끝인 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와 글쓰기의 인연이 로맨틱한 시작은 아니지만, 나는 이것이 어쩐지 싫지 않다. 글쓰기 앞에 무심했지만 열심히 했고, 진심을 담았으니까. 그 모든 것이 사랑의 시작이었다고 웃으며 돌아본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라도 사랑을 붙잡아서 다행이라고.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05화본캐가 넘어진 자리에서 부캐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