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다시 써보는 진로 탐색 이야기
나를 이루는 많은 것들 중 팔 할이 내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는 일상에서 하루의 팔 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맞다. 물론, 자는 시간을 제외한 깨어있고 생활하며 관계 맺는 시간 중 말이다.
이처럼 어떤 관점에서 나의 팔 할을 차지하는 직업, 연구직 회사원. 나는 왜, 어쩌다가 연구원이 되었을까? 내 팔 할을 탐구하는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얼마나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초등학교 때는 부모님이 나에게 바라는 장래희망을 적어서 제출하기도 했다. 그때 엄마는 아나운서를, 아빠는 과학자를 쓰셨다. 둘 다 당시 나에게 어떤 의미로 와닿지는 않았다. ‘그런가 보다~’ 이 정도.
그러는 동안 내게는 화가, 웨딩드레스 디자이너, 천문우주과학자, 건축가 이런 장래희망들이 왔다가 다시 멀어졌다. 그리고 고등학교 생물 시간, 정확히는 생물 선생님을 만났다. 나와 같은 여자선생님이었기에 선생님을 짝사랑하며 공부에 열의를 쏟은 그런 스토리는 아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보여주셨다. 칠판 가득 식물의 잎사귀, 우리 몸의 순환기에서 어떤 일들이 오가는지 그려주셨다. 나는 그림에, 생명체 안의 내가 보지 못하는 움직임에, 이렇게 그려낼 수 있는 무언가에 매료되었다. 신이 난 표정으로 흥미롭게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이 좋았고, 선생님의 생물 그림이 좋았다. 그렇게 생물이라는 과목이 좋아졌다. 그러고 보면 생물은 그림으로 표현 가능한 과학이랄까!
그러던 어느 날 집 앞으로 커다란 버스가 지나갔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그런 곳이 있구나! 가슴이 뛰었다. 이름만으로도 느낌이 왔다. 이 반응을 믿고 밀고 나갔다. 생명공학 연구원이 되겠다고.
하지만 이 꿈도 그 후 다른 꿈에 잠시 덮이는 시간을 가졌다. 더 사랑하는 꿈, 수의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의대라는 곳은 내 성적으로는 재수를 해도 갈 수 없는 곳이었고, 결국 세 번째 수능을 기약하며 일단 대학에 들어갔다. 그렇게 들어간 곳이 생명공학부였다.
한 학기만 다니고 반수를 준비하려고 신입생 OT도 안 가는 나름의 지조를 지켰다. 하지만 3월에 시작된 캠퍼스 라이프에 나는 주변 그 어느 동기보다 푹 빠져들었다. 과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학생회와 동아리 활동도 하며 애정을 쏟았다. 모든 게 재밌었다.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본격 전공이 시작되며 생화학, 미생물학, 분자세포생물학, 유전학, 식물병리학, 단백질공학 등 온통 생물로 가득한 전공과목 리스트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나에게는 대학 생활이 전부였고, 전공이 곧 진로가 되었다. 기필코 전공을 살린 직업을 갖겠노라 다짐하며 대학원 진학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어차피 대학원에 갈 거면 연구실 생활을 일찍 더 많이 경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2학년 중간에 학부 연구생으로 실험실에 들어갔다. 실험실을 고를 때도 진로를 결정하듯 신중하게 골랐고, 그건 지금 돌이켜봐도 탁월한 선택이라 할 만큼 내게 좋은 곳이 되어주었다.
수업과 수업 사이의 공강 시간이면 실험실로 갔다. 대학원 언니, 오빠들에게 실험을 배우며 간단한 일들을 도왔다. 학교 건물 안에, 그것도 연구실 안에 내 자리가 있다는 게 좋았다. 남는 시간에 갈 곳이 있다는 게, 가면 언제든 만날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좋았다. 나는 소속감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내 학부 생활의 절반을 실험실에서 보냈고, 석사 과정에 진학하며 그곳과의 인연은 더 깊어졌다. 매일 아침(토요일도) 실험실에 출근하고, 실험을 하고, 수업을 듣고, 조교로써 실험 수업을 진행하고, 랩미팅을 하거나 미팅을 준비하고,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고 술도 먹고, 보고서도 쓰고 특허도 쓰고 논문도 쓰고 학회도 가고… 돌이켜보면 그것은 회사 생활에 가까웠다. 대학생들의 회사 생활 같은 느낌.
순탄했고, 즐거웠다. 바쁘고 치열해도, 때로는 연구가 잘 안풀려도, 실험실 식구들과 함께 하는 매일매일이 재밌었다. 내가 복이 많았다. 보통은 대학원 시절을 힘겹게 기억하기 십상인데, 내게는 친정 같은 곳, 지금도 스승의 날이나 연말이면 찾아가는 곳이 되었다.
취업도 물 흐르듯 흘렀다. 대학원 졸업을 한학기도 넘게 앞두고 있던 때, 한 기업의 산학 장학생에 지원했고 남들보다 일찍 취직 순서를 밟았다. 서류-1, 2, 3차 면접을 거치며 최종 합격 통지서를 안았다. 그곳이 내 직장이 되었다.
그리고 십 년 넘게 이곳에서 연구직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실험을 하고, 새로운 실험법을 개발하고, 논문을 읽고 쓰고, 제품 공신력을 높이는 근거를 마련하고, 고객을 연구한다. 절반은 대학원생과 비슷하고, 나머지 절반은 제품을 생산하는 여느 회사의 직원과 비슷하다. 그래서 연구원이라는 말보다, 회사원이라는 말보다, 실험하는 회사원 또는 연구직 회사원이 보다 정확히 나의 일을 설명해 주는 말 같다.
이것이 나의 본캐이다. 본캐로 성장해 온 여정이다. 그 길 어디에도 읽고 쓰고 감상하는 부캐는 없었다. 책을 읽지 않았다. 글을 쓰지 않았다. 문학을 몰랐다. 한쪽으로만 치우친 삶을 오래도록 고수했다. 둘 중 하나만 있는 줄 알았고, 둘 중 하나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이과 또는 문과. 이과를 선택했으니 문과에는 어떤 마음도 주지 않았다. 모든 건 선택의 갈림길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이 길로 오기까지 자연스러웠고, 큰 굴곡 또한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부캐라니! 작가가 되고 싶다니! 시를 쓰고 싶다니!! 내게 이토록 커다란 지각변동이 또 있었을까? 이 뒤에 내가 맞이할 시대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이 될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배운다. 또한 역사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기에 배운다. 그래서 써보았다. 업에 이르기까지 나의 역사를.
이 글을 쓰면서 배웠다. 나는 좋아하는 공부를 스스로 선택했고, 이후의 진학과 취업도 오로지 나의 의지였다. 좋아하지 않으면 선택하지 않았을 일들이다. 엄청 열정적인 스타일은 아니지만, 마음 가지 않는 일은 기어이 안 하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고로 내 직업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 결과이고 진행형이다.
본캐만 알고 살다가, 느닷없이 불어든 작가 부캐 바람에 흔들리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내가 써온 역사들을 제법 좋아한다는 걸. 월급을 받기 위해 족쇄처럼 종일 묶여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두근거렸고, 선택했고, 열정과 에너지를 바친 끝에 도달한 곳. 그리고 일하는 동안도 그러한 곳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깨달음 또한 글 쓰는 부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늘 이 글은 작가 부캐가 들려주는 연구원 본캐의 이야기. 내가 바라보는 나의 이야기다.
역시 이들은 돕는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