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아저씨’
친한 형의 할머니 빈소에 갔던 큰 아들이 밤늦게 들어왔다. 운구를 부탁해 다음 날 일찍 나간다며 서둘러 잠자리에 든다. 엄마의 할 일이란 대체로 자식 걱정인지라 연일 계속되는 매서운 추위에 애를 쓰는 아들이 나는 안쓰러웠고, 그 아들은 몇 명의 문상객만이 드문 드문 앉아 있는 썰렁한 빈소가 안쓰러웠다.
조문객의 면면만큼이나 조문객의 수가 장례에 있어서 많은 것을 설명한다. 스몰웨딩이란 말은 있지만 장례식에는 그에 상응하는 말이 없다. 화장, 매장, 수목장 등 고인을 모시는 방법만이 다를 뿐이다. 장례식에 참례하기 위해서는 지구 반대편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기도 한다. 평소 소원했거나 앙금이 있었던 관계가 조문을 계기로 눈처럼 녹는다, 때론 잠시일지라도.
나도 지인들의 결혼식에 참가 대신 축의금만 전달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때와 시를 가리지 않는 부음에 중요한 선약을 희생해서라도 참석하는 편이다. 차비와 체력을 아끼지 않고 먼 지방으로 문상을 다녀오기도 한다. 한반도가 통째로 펄펄 끓어오르던 올여름 어느 날, 지인의 남편분 부고 소식이 참으로 느닺없이 참담하게 받아 들었다. 그늘 하나 없었던 충청도 어느 산 공원묘지에서 매장 의식 내내 서있었고, 그 날 저녁부터 내리 며칠 몸살을 앓기도 했다. 소소한 뒤 사정이야 어떻든 갓 태어나는 부부는 행복의 절정에서 결혼식장에 들어선다. 그 행복의 바다에 내가 참석한다 해도 한 두 방울의 이슬을 보탤 뿐이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축의금을 내고 신랑이나 신부, 혹은 양가 부모 중 누군가와 눈도장을 찍고, 정작 '식'에는 참석하지 않은 체 곧장 잔치 음식을 먹으러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충분히 이해되는 장면이다.
빈소와 장례식에서 참석자가 하는 역할은 명확하다. 분향을 하고 상주와 맞절 후 빈소에 앉는다. 상주는 문상객과 고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울기도 하고 한탄도 하며 아주 조금씩 슬픔을 덜어낸다. 돌아가신 분이 부모님이라면 특히 자식들은 모두 '죄인'이 되고 더더욱 '죄인'이 되기를 자처한다. 이런저런 일화를 열거하며 부모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고, 좀 더 잘 모셔야 했다고, 부모님과 함께 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있다면 좋겠다며 눈물과 한숨을 쏟아낸다. 세상에 다시없을, 세상에 둘도 없을 효자에게도 그 회한은 끝이 없다. 문상객은 상주인 자식들의 말을 그저 들어주거나, 당신은 어떠어떠했기에 그만하면 효자인 셈이라는 등의 말로 회한의 짐을 덜어내어 주기 위해 애쓴다. 이렇게 상주와 문상객이 함께 '잘' 치르어내는 장례식은 상주의 죄의식과 애통을 조금이나마 잠시나마 덜어준다.
유교문화의 정점이었던 조선시대, 자식들은 적어도 3년 동안 돌아가신 부모를 기리며 상주로서 일련의 의식을 치른다. 행동거지를 삼가는 것 또한 죄인임을 자처하는 상주의 기본예절이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지식인 율곡은 3년상을 채 마치지 않고 왕이 내린 벼슬을 받았는데 이는 두고두고 율곡을 배척했던 반대파의 표적이 되었다.
우리의 장례식 문화는 신분과 체면을 강조했던 조선의 유산이다. 장례식장에 늘어선 조화의 숫자가 자식들의 '체면'과 동일시된다. 빈소와 장례식의 문상객 수는 고인이 한평생 '잘 살았다'와 남은 자식들이 부모님 덕에 지금 '잘 살고 있다'의 지표가 된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문상객이 한 명도 없었던, 없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그래서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죄인이다.
알츠하이머, 즉 치매를 8년 동안 앓으시던 엄마가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사시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미국 동부에서 엄마와 같이 살던 큰언니가 요양병원에 계셨던 마지막 몇 년을 포함해서 줄곧 엄마를 돌보았다. 서부에 사는 작은언니도 병원에 계신 엄마를 찾아뵈었지만 한국에 사는 나는 그러하지 못했다. 꼼꼼하고 섬세한 큰 언니가 워낙 엄마를 잘 모시기도 했다. 단순히 한국과 미국이라는 거리 때문이었을까? 한참 크는 아이들에게 내 손이 반드시 필요했다든지, 친정 식구들은 죄다 미국에 있고 혼자 한국에서 고군분투하느라 나도 나름 애쓰는 중이었다는 변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궁색할 뿐이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남편과 아들들과 함께 엄마를 찾아뵈었다. 그 사이 몰라볼 정도로 변한 엄마의 모습에 속수무책으로 내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장모님을 외치며 통곡하는 남편과 부둥켜안고 같이 울었다. 속 깊고 따뜻한 사람이긴 하지만 평소 냉철하기 그지없는 남편에게도 뜨거운 눈물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를 여전히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를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은 날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가 아무래도 돌아가실 듯하다는 연락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고 그때마다 엄마는 다시 '괜찮아'지셨기에, 그리고 얼마 전 비행기를 타고 온 가족이 다녀왔기에 어떻게 해야 하나, 비행기표를 사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날은 저물었다. 자정을 막 넘겼을 때 다시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조금 전 돌아가셨다고.
아침 일찍 비행기표를 사고 한편으로 허둥데며 두어 가지 짐을 챙기고 있을 때 미국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간단한 의식 후 화장을 해서 유골을 한국으로 모셔가기로 했다고, 나는 미국으로 오지 말고 한국에서 장례준비를 하라고, 생전에 엄마는 한국의 선산에, 엄마의 부모님 곁에 묻히길 원하셨기에 그렇게 정했다고. 나는 꾸리던 짐을 풀었다.
몇 시간이 지나고 장례식 절차가 수정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엄마와 언니들은 미국에 오래 살았고 지인들도 대부분 그곳에 있다. 미국에서 빈소를 차리고 제대로 된 장례식을 한다, 화장 후 유골을 한국으로 모셔온다, 선산에서 수목장을 치른다는 결론이 나는 동안 반나절이 지났다. 나는 엄마의 장례식에 갈 기회를 두 번째로 놓쳤다. 막내이고 생전에 돌보아드리기는 커녕 임종도 못한 나는 언니들의 의논과 번복과 결정에 큰 목소리를 낼 주제가 못되었다. 전날 자정 전에 엄마가 돌아가셨기에 벌써 이틀째였고 다음날 아침이 장례식이었다. 공항으로 달려가 비행기를 탄다 해도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5일째 되는 날 늦은 저녁, 미국으로부터 엄마의 유골을 모시고 언니와 형부가 우리 집에 도착했다. 장지는 외가댁 선산이었다. '고모는 사실 출가한 외인인데 ' 운운하는 문중 장손의 예상치 못한 말 한마디에 하루가 또 속절없이 흘렀다. 인간의 희생적인 면모, 이타적인 면모를 설명하며 자신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에 비유할 때 내 엄마의 일생이 바로 그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막내 외삼촌을 비롯해 4명의 외삼촌, 두 명의 이모들의 공부와 시집, 장가드는 일, 삼촌들의 사업 자본금에 이르기까지 맏딸인 엄마는 부모역할을 다하였다. 가깝거나 먼 친척을 돌보는 것도 서울에서 '큰 부자'로 살았던 엄마의 몫이었다. 그들이 서울로 유학이나 볼 일을 보러 올 때 우리 집은 숙소였고 정거장이었다. 엄마가 살아생전 화를 드러내거나 큰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보고 들은 적이 없다. 시종일관 ‘점잖은 분’이었다. 언쟁을 하는 것도 본 적도 없다. 도움의 손길을 요청한 누구라도 엄마는 내치지 않았고 도움을 준 그중 어느 누구에게도 공치사할 분이 아니었다. '출가한 외인' 운운하는 분 역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못 찾을 때 엄마가 '꽂아'준 곳이 그 ‘분’의 첫 직장이었다.
내 집에서 2박 3일 계셨던 엄마의 유골은 긴 여정 끝에 선산에 드셨다. 한국에 있는 멀거나 가까운 일가친척들이 그 날 수목장에 전부 모였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 숨 쉴 구멍 하나는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며칠 동안 먹기는커녕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상태였다. 엄마의 유골을 내 집에서 모시는 동안, 한국에서도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받아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왔었다. 남편에게는 장모님이 돌아가셨고 나에게는 친정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주위에 알리고 빈소를 차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었다.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격론 끝에 남편의 지인 서너 분에게만 알려드린 체로 장례기간이 지나갔다.
엄마를 선산에 모시고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눕자 비로소 눈물이 흘렀다. 그날부터 3년간 울었다. 시시때때로 흐느껴 울고 자주 통곡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밖에 나가기가 두려웠다. 나 자신이 그토록 싫었다. 두문 불출하는 나를 두고 이웃들에게서는 무슨 말 못 할 사연이 생겼을 거라며 추측과 억측이 돌아다녔다. 그중 몇몇 억측들이 내 귀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질기게 울었다. 자주 자리에 누워 앓았다. 엄마가 돌아가셨어요란 한마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애통이 나를 집어삼켰다. 장례식에 참석조차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맷돌이 되어 나를 갈아 뭉그러트렸다. 마음이 선한 한 이웃은 '막내의 울음은 구천에서도 들린다더니, 엄마와 떨어져 산 세월이 길어서 더 슬플 거야'라며 자신만의 이해로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나는 임종도 못한 '일반적인 죄인'에 덧붙여 장례식도 못한 '특별한' 죄인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순식간에 몰아닥친 슬픔을 제대로 담아내지도 여과시키지 못한 나는 비통의 바다에 들어간 체 빠져나올 통로를 찾지 못했다.
나 같은 죄인이 될 수도 있었을 처지를 다행히도 비껴간 사람이 있다. 이미 종영한 지가 한참 지난 지금이라도 보기를 권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이다. 겹겹이 입은 불행이란 옷을 방패 삼고, 온 세상을 향해 날카로운 가시를 돋우고 살아가는 이지안에게 유일한 피붙이인 할머니가 돌아가신다.
이지안의 상사 박동훈이 같은 동네 후계동에 산다. 박동훈과 이런저런 인연으로 연결된 후계동 사람들이 모여 이지안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다. 박동훈의 큰형 박상훈은 집안에서 유일하게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동생 박동훈에게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실직하면 안 돼. 엄마 장례식을 썰렁하게 하면 안 돼, 알았지?"라며 엄마의 장례식 걱정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박상훈이 청소일을 하며 동생들 몰래 한 푼 두 푼 모아 온 돈을 꺼내 동생의 직장 인턴사원인 이지안의 할머니 장례 비용을 치른다.
할머니 장례가 끝난 후 은혜를 꼭 갚겠다는 이지안에게 후계동 아저씨들 중 한 명이 답한다. 내버려두라고, 그렇게 따박따박 계산하며 안 살아도 된다고. 후계동 사람들은 이지안이 안고 살아갈 부담마저 훌훌 털어준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는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 수없이 많고 그 장면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후계동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치른 지안이 할머니 장례식은 그중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나는 그 장면에서 내내 울었다. 영원한 죄인인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깊이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린다, 후계동 사람들에게.
[표지 사진 :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