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랫줄

정릉의 우물가

by 클라우디아

이삿짐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부닥친 문제가 넘쳐나는 시간이었다. 간단히 차려내든, 맘먹고 준비하든 하루 세끼를 마련하고, 먹고, 뒷정리하는 것만으론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이 남았다. 이사는 공간의 이동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쌓아온 네트워크와의 작별이기도 했다. 오늘의 모임에서 다음 모임의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고 이 자리의 모임에서 다음에 모일 장소를 궁리하며 산 너머 산, 골짜기에 겹쳐진 골짜기처럼 시간이라는 공간을 꽉 채우기 마련이다.




스마트폰을 새로 구매하면 그것을 기회삼아 전화번호부를 정리하듯, 한강을 건너 북한산 턱밑으로 이사 오며 이런저런 네트워크를 베어내고 떼어내며 간소화했다. 그렇게 이사의 부산물로 내 손에서 시간이 넘쳐흘렀다. 북한산 둘레길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동네 도서관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가 책을 반납하거나 빌려왔다. 우유 하나를 사겠다는 핑계를 만들어 정릉천을 따라 내려가 마트를 다녀와도 50여분, 기껏해야 1시간 정도밖에 덜어낼 수 없었다.



경동시장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경동시장에 가는 날은 신이 났다. 여러 명의 등산객들과 두어 명의 동네 주민들 틈에 섞여 버스를 타고 20여분을 가면 경동시장이다. 이것저것 쇼핑품목에 있는 것들을 사고 나서도 뭔가 더 살 건 없는지 시장의 거리와 골목들을 두리번거렸다. 주부 구력이 족히 백 단은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들과 나란히 버스정거장에 서서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는 쪽을 힐끔 거리기도 하고, 버스가 오면 재빨리 올라타서 자리를 잡아 앉겠다는 야무진 희망 아래 시장바구니를 든 양손에 힘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집에서 제법 먼 경동시장으로 세월아 네월아 하며 다녀와도 두어 시간이었다, 넘쳐흘러 주체할 수 없는 시간에서 덜어 낼 수 있는 양이.




이사 온 집 옆구리에는 빨래를 널 수 있는 뜰이 있다. 아침밥을 먹고 설거지를 마치면 구태여 이 구석 저 구석을 뒤져 빨랫감을 찾아냈다. 최대한 시간을 많이 소비하고자 빨래를 세분화했다. 당연히 흰색과 검은색 의류를 구별했다. 검은색 의류 중에서도 양말은 따로 분리해 빨았다. 같은 색깔 내에서도 섬세한 의류들과 마구 비벼 빨아도 되는 의류들을 구별해서 손의 힘에 강약을 조절해 세탁했다. 헹굴 때 섬유린스를 쓰는 것과 아닌 것들도 구별 몰론 구별했다. 시간을 많이 사용해야 하니 모든 것은 손빨래로.




세탁기와 건조기라는 인공과 기술을 걷어내고 손으로 빨아 햇빛에 말리는 수동식을 택하니 태양신을 향했던 옛 인류의 의지가 저절로 읽혔다. 날씨가, 그중에서도 맑은 날이냐 아니냐가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다. 가뭄에 콩 나듯이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스마트폰의 일기예보 앱을 정면으로 전진 배치했다. 태양이 반짝이는 예보가 뜨는 날은 우선 빨래하는 날로 정하고 나머지 날짜에 시장이라든가 도서관이라든가 산행이라든가 하는 다른 스케줄을 집어넣었다.



집 옆 마당에 널어둔 빨래




손수건 같은 가벼운 것들은 사소한 바람에도 성미 급하게 빨랫줄에서 뛰어 내려와 마당 한구석에 숨어 있곤 했다. 쏜살 같이 마트로 달려가 빨래집게를 사 왔다. 생애 처음으로 하는 100% 손빨래요 빨래집게 구매였다.




빨래를 널 때는 빨래집게뿐만 아니라 선글라스도 필요했다. 빨랫줄은 내 작은 키로는 순순히 닿을 수 없는 높이에 매달려 있다. 빨래를 널기 위해서는 힘껏 까치발을 해야 했다. 일본과의 국가대항전에 나간 배구선수가 블로킹할 때처럼 있는 온 힘을 다해 양팔을 들어 올려 빨래를 널었다. 목을 한없이 뒤로 젖히다 보면 내 두 눈은 자연스레 태양빛과 맞짱 뜨는 각도가 되었다. 칠흑처럼 검은색의 선글라스는 필수였다. 챙이 넓은 모자와 영화 ‘맨 인 블랙’의 윌 스미스와 토미 리 존스가 씀직한 새까만 렌즈의 선글라스를 장착했다. 30여분 빨래를 널고 나면 팔뚝은 계란 두어 개는 족히 구워 낼 온도가 되고 정수리와 밖으로 드러난 살갗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빨래를 너는 뜰은 북한산의 긴치마 자락 하나가 넌지시 내려와 쉬는 곳을 마주 보고 있다. 빨래를 다 널고 나면, 마치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 영화를 만드는데 헌신했던 모든 인적, 물적 자원들의 리스트가 하나씩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를 멍하니 치어다보듯, 북한산 저 너머에서 슬며시 내려왔다 냉큼 물러나는 서너 개의 바람이나 저어기 먼발치서 나를 예의 주시했던 뭉게구름을 치어다보곤 했다.



옆 마당에 널어둔 빨래



“댁네는 식구가 몇이오?” 산자락에 억척스레 매달려 집들을 짓다 보니 집들의 위치가 하나씩 하나씩 높아지는 동네이다. 윗집의 마당에서 봉긋이 솟아오른 구석의 장독대에서 까치발을 하면 내가 서있는 뜰이 내려다보인다. 빨래를 다 널고 나서 여지없이 북한산 치맛자락을 소심히 훔쳐보느라 집중하고 있던 나에게, 머리는 하얗게 세었으나 얼굴은 그만큼의 나이로는 안 보이는 할머니께서 윗집 장독 대위로 머리를 쑥 내밀고 말을 걸어오셨다. 미쳐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어째 그리 빨래를 매일 하슈? 빨래가 왜 그렇게 많수? 식구가 많수?” “빨래 하나에 집게 하나면 되지 왜 두 개씩이나 쓰슈? 그렇게 하면 빨래 걷을 때 얼마나 힘드는데 그러슈?” 교무실에 까닭 모를 이유로 불려 간 학생처럼 주눅이 든 채로, 여름이라, 날이 더워, 식구들이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해서라며 쭈삣주삣 옹알이하는 것으로 이사 온 동네에서 처음으로 이웃을 사귀게 되었다.




옆 마당 빨랫줄에 매달아둔 무청 시래기



동네로 들어오는 트럭행상인들에게서 물건을 살 때 윗집 할머니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이 양파는 저번보다 별로다, 이번 감자는 저번과 물건은 ‘삐까 삐까 “하나 가격이 더 비싸다는 등, 할머니의 노골적인 평가는 장사꾼에겐 훼방이지만 나에겐 귀중한 정보였다. 일본어인듯한 ”삐까 삐까’는 느낌상으로 비슷하다는 뜻이 아닐까 짐작하지만, 혹시 포르투갈어? 설마!




혹시라도 할머니가 우리 뜰로 내려와 내가 널어놓은 빨래를 일일이 들여다보고 제대로 빨았는지 아닌지 검사라도 하실까 봐 저번보다 품질이 떨어지거나 가격이 비싼 물건을 사서 할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싶진 않았다. 물론 할머니의 단호한 평가를 거친 감자는 푸슬푸슬거리며 보드랍고 달았고, 양파는 오래 두어도 싹이 나지 않고 속살은 희고 탱글탱글했다.



왜 있지 않은가? 이사악이 레베카를, 이성계가 강 씨 부인을 만난 우물가. 우물가에서 만들어진 역사가 너무나 많아 일일이 나열하기에는 하루 이틀도 짧다 할 것이다. 이들은 우물가에서 막연했던 삶의 궤적을 확연히 모양 짓기도 하고, 기왕에 쌓아 올린 궤적을 뒤틀기도 했다. 이곳은 빨래를 하거나 일용의 물을 길어 올리기도 하고 소문과 흉문의 원천이기도 하며 사건의 시발점이자 종점이기도 하다. 소설 ‘토지’에서 강청댁과 임이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악다구니를 하던 우물가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먼 길에 지친 나그네가 목을 축이며 새로이 터전을 찾아내고, 미쳐 인식하지 못했던 아이덴티티를 길어 올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모세가 싯포라를 만나 이집트인이라는 겉옷을 벗고 유대인이라는 실체를 얻게 되는 우물처럼.



우물이 없는 지금의 정릉에서 내가 만들어낸 최초의 네트워킹은 바로 빨래를 너는 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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