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Country (Part 1)

to Los Angeles, California,

by 클라우디아





햇수로 유학생활 4년째 되던 해, 남편이 'transfer' 이야기를 꺼냈다. 미국에서의 모든 것이 순풍에 돛 단 듯 흘러가던 때였다. 염려와 기대 속에 출발한 미국 생활은 안착을 지나 안정기였다. 이제 2~3년이 지나면 학위를 머리에 이고 짐보따리를 등에 지고 귀국길에 오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남은 시간을 즐거이 헤아리고 있을 때였다.





박사과정에서의 'transfer'라는 단어는 그저 '전학'이라고 옮겨 쓸 수 없다. 'transfer'라는 것은 학교가 바뀌고, 지도교수가 바뀌고, 이미 받은 학점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출발 선상에 다시 서는 것이다. 남편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왔을 때 나는 미국땅에서 '유목민'이다라는, 잊고 살았던 사실을 깨달았다. 고된 이동후 천막을 치고, 짐보따리를 풀고, 불을 때고, 끓인 물로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아 좋다' 하는 순간 '우리 천막 걷고 이동하자'라는 말을 듣는 느낌이었다. 4살과 돌 지난 두 아들 돌보기에 매진하고 있었던 나 자신을 위한 계획도 있었다. 해를 넘기어 둘째 아들이 데이케어 센터에 갈 나이가 되면 내 공부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두 아들, LA로 이사하기 전 겨울






설명이 필요 없는 표정이나 순간이 있다. 남편은 모색과 고심이 길건 짧건 시종일관 말이 짧은 사람이다. 남편의 거두절미와 표정으로 알았다, 이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불씨를 흙으로 덮어 끄고 천막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남편 입에서 나온 'transfer'라는 말을 들은 후, 멍을 때리며 하루 이틀을 보내고 어떻게 되겠지 하며 또 하루 이틀을 보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하루 이틀을 보내고, 모든 것이 아쉽고 모든 것이 불안해서 또 하루 이틀을 보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입을 꾹 다문체 남편에게 비행기표를 건넸다. 남편은 이미 몇 개의 대학원에 박사학위 과정을 신청한 후였다. 입학허가서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 중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발로 뛰고 육안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학교를 옮기고 온 가족이 다른 도시로 이사한다는 것은 편지 두어 통, 전화 한두 통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미국 동부의 도시들 뉴욕, 위싱턴, 필라델피아 등등의 사이를 잇는 비행기를 'shuttle flight (셔틀항공편)'이라고 부른다. 한 시간 남짓한 비행시간으로 출퇴근이 가능하여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동부에서 서부로,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날아다니는 비행기 중에서 한밤중에 출발하여 새벽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red eye flight'라고 부른다. 비행기에서 제대로 잠을 못 자고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로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의미이다. 남편은 이들 비행 편을 이용해 옮길 학교와 이사할 도시를 둘러보았다. 미국 대륙을 가로질러 살던 곳인 뉴욕에서 제일 먼 곳, 태평양 연안의 로스앤젤레스로 옮기는 것이 결정되었다.



garage sale [출처 : 구글 이미지]






술을 마시며 밥을 먹으며 여러 인연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갖고 갈 짐을 추렸다. 가구, 집기, 식기, 의류 중에서 건네는 손이 부끄럽지 않을 것들을 추려서 받을 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루 날을 잡아 집 앞에서 garage sale판을 벌였다. 팔만한 것들을 정리하고 다듬어 가격표를 붙였고 빵과 과자도 구웠다. 이익을 구하고자 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하루가 끝난 후 내 손에 쥐어진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거기에 내 수중의 돈을 보태어 시장을 봤다. 이웃들과 고기 파티를 벌였다. 학교에서도 몇 명 안 되는 한국인들, 동네에서도 몇 가구 안 되는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끈끈한 '이웃'들이었다.






garage sale [출처 : 구글 이미지]





뉴욕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오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한 이웃이 작별의 아쉬움을 달랠 겸 다 같이 소풍을 가자고 제안했다. 대서양을 가로질러 뉴욕만으로 들어서면 코딱지 만한 섬 리버티 아일랜드 위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뉴요커 중에서도 이곳을 가본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뉴욕을 찾는 사람들은 더 이상 대서양을 가로질러 배를 타고 오는 것이 아니다. 오며 가며 지나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어서 몇 안 되는 선착장에 가서 페리를 타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자유에 굶주려 찾아온 이들에게 먹이를 주듯 맨해튼의 입, 바로 그 앞에 서있는 여신상으로 우리의 작별식을 겸한 소풍을 갔다.







자유의 여신상과 리버티 아일랜드 [출처 : 구글 이미지]





네댓 가족이 한 부대가 되어 우루르 몰려가 페리를 타고 리버티 아일랜드로 갔다. 녹슨 구리를 벗겨내고 막 새로이 단장을 끝낸 여신은 푸른 바다색을 배경으로 더 푸르게 빛났다. 왕관에 있는 전망대까지 계단으로 올랐다. 30대였던 우리는 아직은 젊었고 아이들은 팔딱팔딱 뛰어놀 나이였다. 여신상 머리에 있는 전망대의 선물가게에서 한창 유행이었던 냉장고에 붙이는 마그네틱과 열쇠고리를 사서 선물로 주고 선물로 받았다. 여신상에서 내려와 잔디밭에 둘어 앉아 표정과 자세를 듬뿍 담아 사진을 찍었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며. 우리 집 책장 맨 아래 상자 속에는 그때 사진들이 남아있다, 그때 누군가의 말대로 사진이 남았고, 그날의 기억도 내 머릿속에 이렇게 남아있다.







표지 사진 자유의 여신상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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