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Los Angeles, California
미국 대륙 자동차 횡단의 시동을 켜는 것은 트리플에이(AAA: American Automobile Association)이다.
시금치 한 단을 사기 위해서도 자동차 열쇠를 챙겨야 하는 미국인들에게 자동차는 그들의 발이다. 1902년에 만들어진 '전 미주 차량 연합'인 트리플에이는 운전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비영리단체이다. 차의 시동이 안 걸리거나, 타이어가 펑크 나거나 배터리가 방전되는 등 고장이 났을 때 트리플에이가 해결해준다. 운전 중 자연재해로 곤란에 처하거나 고립되었을 때, 실수로 차량의 기름이 떨어졌을 때 트리플에이로 전화해서 해결할 수 있다. 미국 전역에 촘촘하고 튼튼한 거미줄로 연결되어 있는 트리플에이에서 발행하는 로드맵(Road Map: 도로지도)으로 목적지까지의 경로를 짜고 호텔과 식당 등에 대한 정보와 할인도 받을 수 있다.
트리플에이회원으로 연회비를 내거나 우리 식구처럼 한 번의 차량보험을 사면 각종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그 보험료는, '이 가격 실화냐?'하고 되물을 정도로 저렴했다. 연회비는 각종 서비스 중 하나만 받아도 본전을 뽑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팩트'가 가능한 것은 미국이 '자동차'를 기반으로 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륙의 개척자들이 말과 마차 다음에 줄곧 사용해온 이동수단은 자동차였다. 그 바탕 위에 차량 운전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시스템'인 트리플에이는 어마어마한 수의 회원을 확보하여 '설마'하고 놀라게 하는 '회비와 보험료'를 받고 '우와'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1991년 '차량'보험회사 트리플에이의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는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트리플에이보험을 샀다.
트리플에이 직원과 머리를 맞대고 목적지 로스앤젤레스와 중간 기착지인 인디애나 폴리스 주립대학에서의 3~4일 휴식을 밑그림으로 하여 미국 대륙을 관통할 3주의 행로를 짰다. 내가 유일하게 강력히 원한 애리조나의 인디언 보호구역 (Indian Reservation area)을 포함시켰다. 그 외 가고 싶은 마을과 도시가 로드맵에 표시되었다. 우리 아이들의 나이가 고려되었고 하루에 달릴 거리가 계산되었다. 그날그날 잠 잘 곳들이 촘촘히 동그라미 쳐지며 우리 식구들의 대륙횡단 로드맵이 완성되었다.
동네 이웃과 친구들이 올망졸망 싸준 먹을 것과 기타 등등, 우리 식구들이 3주 동안 입을 옷가지와 기타 등등을 차 트렁크가 미어터지라 챙겨 넣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한 마디씩 외치는 응원의 말을 야무지게 주어 담고 차에 올랐다. 작은 아들을 차량용 아기의자에 앉혔다. 책을 한 보따리 낀 큰아들이 동생 옆에 앉았다. 나는 트리플에이지도를 품에 안았다. 남편이 차 시동을 걸었다.
트리플에이아저씨가 우리와 하이파이까지 해가며 명심시켰던 '2시간 운전 후 반드시 휴식'은 시계를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지킬 수 있었다. 우리는 더운 땅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시간은 자동차보다 더 빨리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겠다며 학기가 시작하기 한참 전에 출발했건만 5월인데도 벌서 더웠다. 기저귀만 하나 달랑 차고 아기용 의자에 앉아 잠자고 있던 작은 아이가 우잉하며 기지개를 켜고 울기 시작할락 말락 하면 운전한 지 2시간째였다. 출구를 빠져나가 식당을 찾아야 할 때였다. 둘째 아들의 지저귀를 갈고 우유와 이유식을 먹인다. 다시 자동차에 타면 작은 아들은 형과 옹알거리거나 작고 통통한 손가락을 쫙 펴서 버둥대며 창밖을 가리킨다. 한참을 그렇게 놀던 작은 아들은 푸이푸이 콧숨을 쉬어가며 새근새근 잠잔다. 시간이 흐른다. 아들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온몸을 꼼지락거리다가 입술을 실룩실룩하고 울먹일 태세를 갖추면 운전한 지 꼭 2시간째였다. 우리는 얼른 출구를 찾았다. 해시계 물시계 모래시계 이전에, 친절하신 조물주께서 갖추어 주신 배꼽시계였다.
도시와 마을, 산과 강, 평야와 골짜기를 지났다. 매일이 새로운 지형이었고 하루하루가 처음 보는 마을과 사람들이었다. 전심전력으로 돌보아야 하는 뒷좌석의 아들 둘과 제대로 봐야 하는 지도가 내 손에 있었다. 거의 30년이라는 세월 너머의 그 20일은 당연히 세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두 가지가 아직도 또렷하다. 넓어도 정말이지 너무나 '넓은' 대륙이었다. 그 위에 띠엄뛰엄 점찍듯 놓여 있는 마을들엔 많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TV, 편지와 전화 외에 달리 외부와 교류가 없었던 그들은 대도시에서 여러 인종이나 종류의 사람들과 복닥이며 뭔가를 주거나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들을 보니 미국이라는 나라가 '대체로' '보수적'임이 피부에 와 닿았다.
두 번째는 도로 위 표지판들과의 '교감'이다. 충분한 시간 동안 그곳을 지나다니지 않은 운전자라면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는 '운전자 편의 (driver friendly) 표지판'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정보와 경고의 내용이 아니라 '여기로 이렇게 오면 돼, 응 잘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안내자, 사람이었다. 그 표지판들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난생처음으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한 것이 그 표지들위에 쓰인 ‘다정한’ 문구들이었다..
인디애나 폴리스의 선배 부부 집에서 며칠 동안 머무르며 자동차와 우리의 지친 다리는 잘 먹고 잘 쉬었다. 애리조나 인디언 보호구역에 머물렀다. '인디언'으로 태어나 여전히 '인디언'이며 죽을 때까지 '인디언'인 마지막 '인디언'들의 마을, 그 안에 있는 통나무집에서 3일을 지냈다. 애리조나의 사막지역을 지나면서는 현생에서는 더 이상 안 봐도 될 만큼 많은 선인장을 보았다. 캘리포니아의 데스 밸리 (Death Valley National Park)는 머무르고 관통하는데 4일이 걸렸다.
마지막 관문인 록키산맥을 앞에 두고 고속도로 순찰차에 걸렸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자동차의 후미등 하나가 깨져있었다. 깨진 후미등을 '곧' 갈아 끼우겠다는 다짐을 받고서 순찰차는 우리를 보내주었다. 그는 우리 뒤를 바짝 따라왔다. 우리가 고속도로위의 출구 하나를 지나치자 그 차는 다시 앵하며 우리를 잡았다. 아까 그 출구에서 빠져나가 후미등을 고쳐야지 왜 그냥 지나갔냐고 경찰이 물었다. 오늘 밤 머무를 목적지가 얼마 안 남았으니 그 마을에 가서 고치겠다고 우리가 대답했다. 경찰은 안된다고 잘라 말하며 자기차 뒤를 바짝 따라오라고 말했다. 다음 출구에서 빠져 자동차 정비소에 가서 정비사와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 경찰은 떠났다. 여기서 남편과 나의 기억이 엇갈린다. 나는 심히 '깐깐'했던 경찰로 기억하고, 남편은 그 에피소드는 명백히 '인종차별적'이었다고 기억한다. '차별'이나 '폭력'의 정의와 정도는 '당하는 자'의 것이며 남편이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그 사건을 다시 음미해보니 내 생각도 인종차별 쪽으로 기운다.
록키산맥을 기어 올라갔다. 모든 차들이 왠 간한 속도를 내는데 우리 차만 그저 한 마리의 굼벵이였다. 자동차엔 탑승자도 짐도 꽉 차 있었고 어릴 때 중이염을 앓았던 남편은 높은 고도에 귀가 아파 눈물을 줄줄 흘렸다. 록키는 산맥이어서 그 기어가는 속도가 당연한 줄 알았다. 록키산맥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 기어판을 보고 알았다. 저속 기어로 바꾸지 않고 내내 고속으로 올라왔던 것이다. 록키에서 우리만큼이나 무리했던 것이 자동차였다.
Albert Hammond의 노래 'It never rains in southern california'처럼 비로 질척거리지 않는 땅, 천사들의 땅 Los Angeles에 도착하니 야자수가 손을 번쩍 치켜 들고 우리를 향해 흔들었다. 우리 식구와 비슷한 구성원으로 이와 같은 기간 동안 미국 대륙을 횡단한 경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아직 듣지 못했다. 뉴욕을 뒤로하고 달린 지 21일째 되던 날이었다.
표지 사진 로스앤젤레스 야자수 [출처 :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