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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라우디아 Jul 23. 2020

그동안 즐거웠어 1

우리 이제 찢어지자





이제는 집을 나가서, 부모 곁을 떠나 혼자 살라고, 아들에게 독립을 종용하게 된 여러 사정중 하나는 내 양쪽 손과 팔목이 시원치 않아서이다.




몇 년 전 광화문 광장에 구름 떼처럼 몰려든 인파 속에서 밀쳐지고 자빠지며 오른 손목 인대를 다쳤다. 시간과 돈을 투자해도 쉬이 낫지 않았다. 다친 오른손의 일까지 떠맡게 된 왼쪽 손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 통증이 팔목과 어깨로 차올랐다. 양손으로 물건을 드는 건 고사하고 손에 쥔 것을 빈번히 떨어트렸다. 깨진 유리조각을 쓸거나 흘린 물을 닦을 때마다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짜증과 불안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몇십 년 동안 겁 없이 해냈던 집안일이 조금씩 버거워졌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손과 팔목이 저려 숙면할 수 없는 밤이 잦아졌다. 아침에 억지로 눈을 뜨면 잔 것도 안 잔 것도 아닌 흐리멍덩한 정신과 육체를 흔들어 깨워야 했다. 네발로 기어 다니다가 직립하여 두 손을 쓰게 된 인간의 진화과정을 구태여 생각해보지 않아도 양쪽 손을 맘껏 쓸 수 없는 것은 타격이었다. 치료를 해도, 시간이 제법 흘러도 완전히 낫지 않는 양쪽 손과 팔을 볼 때마다 내 나이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망가지며 노인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작년 9월 초 어느 날, 베이글 반죽을 성형하고 2차 발효를 기다리며 잠시 소파에 앉으려던 찰나 목에 예리한 통증을 느꼈다. 목을 움직일 수 없었고 숨을 쉬기 힘들었다. 격한 통증에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사이도 없이 입던 옷 그대로 지갑만 챙겨 들고 정형외과를 찾았다. 의사 선생님 앞에 앉자 눈물보가 터졌다. 엑스레이를 찍고, 목디스크라는 진단을 받고, 통증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받는 내내 부끄러움도 모르고 울었다.




집에 돌아와 처방약을 먹는 며칠 동안 생각했다. 대책을 세웠다. 소질도 있고 즐거이 해왔던 집안일을 줄였다. 작년 겨울 김장은 예년의 3분의 1로 줄여서 해치웠다. 해마다 빠지지 않고 담갔던 총각김치와 동치미도 두 눈 질끈 감고 생략했다. 가을이면 시장 매대에 수북이 쌓이는 병아리색의 통통한 햇생강으로 만들던 생강청도 망설임 끝에 포기했다. 가족 생일이나 명절에 만드는 음식도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만큼 줄였다. 설날에 만두는 빚었지만 만둣국과 환상의 짝꿍인 나박김치는 만들지 않았다. 국물을 자박하게 잡고 야채와 과일을 듬뿍 넣는 내 시그니쳐 나박김치를 누구보다도 아쉬워 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생필품은 거의 온라인으로 구매했다. 직접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나서 사야 직성이 풀리던 음식재료들도 온라인 구매를 적극 활용했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가 강제한 집콕 생활까지 더해져 나는 어느새 적극적인 온라인 커머스 달인이 되었다.




 


평범한 우리 집밥






가끔 도움을 받던 수면 유도제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남아있는 약을 쓰레기통에 밀어 넣은 날, 내 체력을 아껴 쓰기 위해 더 강력한 전략을 세웠다. 남편과 아들이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 식구들이 모여 앉아 먹는, 국과 여러 반찬을 곁들인 '밥'은 하루에 한 끼만 준비하기로 했다. 저녁은 불고기나 스테이크 샐러드, 카레나 콩국수처럼 간편식을 준비하겠노라고, 한 끼를 과하게 먹은 날은 심지어 비빔메밀국수나 수제비 같은 ‘분식’을 제공하겠노라고, 그걸 만들 체력조차 안 되는 날이면 외식도 불사하겠노라고 남편과 아들에게 선언했다. 오랜 시간 동안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지켜보던’ 두 사람은 쌍수를 들고 양발을 구르며 내 결정을 반겼다.




 


칼칼한 음식이 생각날 때 해 먹는 양배추채&비빔메밀국수





저녁 한 끼로 준비한 불고기





‘노화’가 던진 ‘심약한 체력’이란 문제에서 내가 내놓은 답은 ‘선택과 집중'이었다. 이 전략의 정점인 '아들의 독립'이란 어젠다를 남편과 아들의 밥상 위에 올렸다.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고 결국은 사그라들 것이 뻔한 체력과 정신을 끌어모아 챙길 존재로 남편과 아들 중에서 남편에게 집중하기로 맘먹었다. 보고 있으면 맘이 쓰이고 그 맘과 함께 손과 발이 따라가기 마련이니 아들을 ‘내 눈앞에서 치우겠다는’ 뜻이었다. 늦게 퇴근하기에 집에서 밥도 잘 안 먹는다며, 엄마에게 도움이 되면 되었지 엄마를 괴롭게 만들지 않는다며 아들은 항변했다. 참으로 뭐를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말씀'이다.




큰아들은 한마디로 '까다롭다'. 우선 입성이 까다롭다. 옷에 묻은 희미한 흔적이나 때를 가리키며 아들이 나에게 다가올 때 남몰래 뒤로 한숨을 삼킨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아들이 그날 입은 옷을 챙겨 들고 요리조리, 구석구석 살펴서 빨래할지 거풍 할지 결정하는 것. 손빨래를 할지 기계 세탁을 할지 세탁소에 맡길지 결정하는 것. 거풍 해야 하는 옷에는 탈취제를 골고루 뿌리고 각을 잡아 옷걸이에 걸어 바람이 드나드는 곳에 걸어 두는 것. 충분히 말랐는지 냄새는 잘 빠졌는지 옷에 코를 박고 킁킁거린 다음 빡세게 각을 잡아 개거나 아들 전용 옷걸이에 잘 걸어두는 것. 이것이 대략적인 아들의 입성 챙기기이다. 그동안 이를 감내한 것은 한 줌도 안 남은 식어빠진 모성애가 아니라, 아들의 까칠함이 전적으로 나를 닮아서이고 내가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다. 아들 옷은 죄다 흰색과 검은색이고 회색이나 남색이 가뭄에 콩 나듯이 한두 점 있다. 흰색과 검은색이 얼마나 간수하고 관리하기 힘든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여행지에서 아들과 나의 간단한 식사





아들의 독립을 생각을 하면 좋았다가 이내 싫었다가를 반복했다. 무엇보다도 아들과 나는 소통이 잘된다. 큰아들과 나는 음식도, 옷에 대한 취향도 비슷하다. 아들과 나는 여행할 때 좀 덜 먹고 덜 자더라도 많이 걷고 많이 보는 걸 선호한다. 여행지에서 식빵 조각을 뜯으며 아낀 시간으로 돌아다니는 일이 큰아들과 나에겐 자연스럽고, 남편과 작은 아들에게는 언감생심, 말도 못 꺼낼 일이다. 우리 둘은 개그코드도 잘 맞고 좋아하는 드라마도 많이 겹친다. 아들은 나와 함께 지난 몇 달 동안 서바이벌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터 트롯'을 안방 1열 직관했다. 그 프로그램에 나온 출연자들에 대한 우리 둘의 느낌과 '픽'이 같았다. 데스매치와 준결승 일대일 매치에서 누가 올라갈지에 대한 아들과 나의 의견은 같았고, 그 예상은 매번 맞아떨어졌다.




아들이 수시로 제공하는 '디지털 효도' 또한 포기하기에 다소 불안하고 아쉬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좀 더 있다가 아들을 독립시킬까 생각했다가 저녁이 되면 아니야 지금이 아들을 보낼 적기야라고 생각을 돌리기를 반복했다. 생각이 그렇게 왔다 가기로는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을 하면 엄마의 네버엔딩 잔소리와 자신에 대한 기대로 여전히 번득이는 아빠의 눈을 피할 수 있기에 오예! 자유다! 자유! 다라고 내적 함성을 지르며 아들의 맘은 부웅 뜨는 듯했다. 부모의 집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의식주 (의-입성 수발)를 생각할 때 아들의 맘은 도루 접혔다. 나침판의 바늘처럼 아들과 나는 제법 오래 흔들거리다가 드디어 아들의 독립이 결정되었다.





여행지에서 때론 식사 대신 음료 한잔씩






여행지에서, 오로지 식빵 한 조각 만으로도 충분한 한 끼 [도쿄, Centro the Bakery]





아들이 독립할 집을 알아보기 시작하고 겨우 하루가 지나자마자 우리는 꽝! 부딪쳤다.     





표지 사진 - ‘까칠한’ 아들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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