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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vecin Oct 29. 2022

* 슬렁슬렁 (2022.10.29.토) *

슬렁슬렁 (2022.10.29.) *      


   - 좀 슬렁슬렁 해 봐~~          



   점심시간에 회의가 있는 경우가 많다. 4교시가 없으면 괜찮은데 4교시 수업이 있는 날 회의가 잡혀있으면 밥 먹는 시간이 촉박하다. 나에게는.. 일단 밥도 많이 가져오고 먹는 시간도 느리다. 이번 주에도 4교시 수업이 있는 날 점심시간에 회의가 있어서 마음이 급했는데 식당에 가보니 맛있는 음식들이었다. 아마도 치밥과 유부우동이었던 듯.. 좀 늦게 도착한 식당에서 양 조절을 한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 많았던지, 시간을 확인하면서 열심히 먹었지만 결국 회의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먹던 음식의 2/3를 버려야만 했다.     


   회의시간에 맞춰서 가보니, 정작 사람들이 많이 와 있지 않았다. 밥을 다 버리고 왔다며 안타까워하는 나에게 A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그러니깐, 밥을 좀 빨리 먹어야지...     


   나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말씀을 하시니.....ㅠㅠ... 그날 회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것보다, 밥을 거의 버리고 왔다는 것이 얼마나 속상했던지....*^_^*..     


     

   음대 다니던 아주아주 오래전, 우리 과에서는 매 학기 2번씩 즉 중간과 기말에 작곡한 곡을 제출해야 했다. ‘곡 마감’일은 아마도 토요일 정오 12시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일주일 동안은 거의 모든 사람이 폐인처럼 다녔었고, 특히 하루 전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는 거의 모두들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지금처럼 악보 프로그램이 있던 시대가 아니어서 모두 손으로 직접 악보를 그려서 제출했는데, 토요일 과사무실 앞에서는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눈이 쑥 들어가고 잘 씻지도 않은 모습에 트레이닝 바람으로 나타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곡 마감 시즌에는 주로 이런 이야기들이 오간다.     


 - 곡 다 썼어??

 - 아니ㅠㅠㅠ...시작도 안했어...ㅠㅠㅠ

 - 나도!!! 어떻게 하지...ㅠㅠ     


   물론, 대부분은 엄살을 부리는 말들이었지만 곡 마감일이 다가오면 진짜 피가 마른다. 그런 경험이 싫어서 일찍 일찍 시작해야겠다고 매번 다짐을 하지만 사실, 잘되지 않는다는 것을 늘 느끼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아마 지금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때처럼 급하고 바쁘게 콩 볶아 먹는 심정으로 며칠만에 후다닥 해 버리고 말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때 B선배가 C선배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한참 웃었던 기억이 있다.     


 - C~~, 이번 곡 어떻게 썼는지 알아??

 - 어떻게 썼는데??

 - D 작곡가의 악보를 거꾸로 해 놓고 베꼈지!

 - 진짜??

 - 그런데, 그렇게 해 놓고서 연주해 보니까 괜찮던데..??

 - 하하하~~ 야~~~너~~~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아마도 곡을 쓰는 게으름은 여전하겠지만 좀더 열심히 학교를 휘젓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왜 무엇이든지 한걸음 뒤에 있는 느낌일까....     


   사실 나는 오히려 일찍 시작하기는 하지만 무엇이든지 신중하게 하는 스타일이어서 끝내는 시점이 늦었다. ‘휘리릭~’하는 신속파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무언가 제시간에 끝내려면,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고나 할까...     


 - 너는 숲을 보는게 필요해...

 - 나무만 보고 있는 거 아닐까..

 - 고민하지 말고 과감하게 결정해...     


   내가 자주 들었던 말이다. 전체를 조망하고 쉽게 쉽게 가도 되는데 하나 하나 짚으면서 가고 있으니 진행이 느리다는 것... 입시 때도 잘 만들고 못 만들고의 문제가 아니라 ‘제시간에 끝내기’가 목표였으니까.. 그런데 잘 바뀌지 않는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주 조금씩 바뀐 부분은 있지만 역시나 비슷하다. 일단 어떤 프로젝트가 있으면 ‘일.찍.’ 시작해서 자꾸자꾸, 오래오래 보면서 준비해야 하는 것... 그래야 제시간에 맞출 수 있다. 그런데도 늘 실수가 많고 늘 새로운 것이 보이며 심지어 전체 틀이 바뀌기도 한다. 오래전 이걸 본 E가 말했다.     


 - 좀 슬렁슬렁 해 봐~~     


   무언가 일.찍. 시작하고는 있고 계속 그 문제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행은 또 느리니, 옆에서 보았을 때, 걱정이 많아서 노심초사하는 것 같아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 슬렁슬렁 : 서두르지 않고 느릿느릿 굼뜨게 행동하는 모양.     


   그러면서 이렇게도 말했었다.   

  

 - 대충대충이랑은 다른 거 알지???     


   서두르지 않고 느릿느릿 굼뜨게 행동해 볼까.. 그런데 사실, 엄청 게으르고 굼뜬데... 사람들은 또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니다. 밥은 느리게 먹지만 일하는 것은 또 무언가 급하고 몰아치는 느낌이 있는 걸 아는 걸까... 다른 것보다도 자주자주 오래오래 봐 주어야 해서 그런건데 말이다.     


   정리할 것들이 쌓여지고 새로운 것들도 계획해야 하는 요즘, ‘슬렁슬렁’이라는 (재미있는) 단어를 머릿속에 넣어놓고 계속 음미하며 뜻을 새겨보고 있다는 것을, (나에게는 새로웠던) 이 단어를 알려준 옛날의 E는 알고 있을까나....     


 - 슬렁슬렁....     


*******************     


*** 토요일 강의를 조금씩 늦고 있다. 10분....매번 10분을 늦는다. 원래 제 시간에 맞추는데 이번에는 왜 조금씩 늦고 있을까... 생각해 보니 몇 가지 이유가 있다.     


 - 아침밥을 먹는다. 

 - 후식도 먹는다.

 - 커피점에 들른다.

 - 걷는다.

 - 주변을 둘러본다.

 - 걸음이 느리다.     


   강의시간이 총 2시간인데, 나는 1시간 50분을 듣고 있는 것. 오늘도 10분 늦었다.ㅠㅠㅠ     


   저번 주에는 강의가 끝난 뒤 무언가 둘러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지하에 있는 F 음악전문샵에 들렀다. 일하는 것과 달리 쇼핑은 또 ‘세월아, 네월아~’하는 스타일이어서 오래 걸린다. 이것저것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몇가지를 샀는데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머릿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수도없이 반복하면서...    

 

 -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 아냐.. 이게 나을 듯..

 - 아니아니...이게 더 나을 듯...

 - 아....아닌가..??     


   인터넷 쇼핑을 할 때도 장바구니에 담아 놓기 전까지 몇 주를 생각하고, 몇 주를 생각하다가 ‘괜찮은 듯..’ 하고 생각이 되면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필요해!’라고 결정을 하면 결재를 하기에, 무언가 하나 사는데 엄~~청 오래 걸린다. 오프라인 쇼핑은 오랜만이어서 더 오래 걸렸는데, 나오면서 직원에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 오래 쇼핑해서 죄송해요...

 - 아....아니예요...*^_^*..    

 

   이 말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이것저것 가져가서 질문도 많이 했기에 진짜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나와서 들린 G 상점.... 거기서는 무얼 하느라 그랬는지 또 1시간을 있었다. 집에 오니 엄마가 말씀하신다.

     

 - 강의가 2시간이었을텐데, 쇼핑을 2시간 하신 것인가요???

 - 아???? 네....그랬네요... 사실 강의는 1시간 50분이었어요...10분 늦어서...

   하하하~~~*^_^*..     


   여기서야말로 ‘슬렁슬렁’이었다는....     


   *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며 골랐던 책갈피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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