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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vecin May 06. 2023

* 하던 일 계속하기 (2023.05.06.토) *

하던 일 계속하기 (2023.05.06.) *      


 - 생각하지도 않은 일이 생겼다고, 네가 하고자 했던 일을 멈추지 마!     


  담임을 맡았을 때 학기마다 2번의 공식 상담을 했었다. 3월 처음 상담시간에는 일명 ‘호구조사’를 하는데, 17살까지의 ‘My Life’를 미리 받아서 읽어본 뒤 별로 길지 않은 상담을 한다. 내가 담임을 했을 때 사용했던 ‘My Life’를 지금 학년부장을 하면서 1학년 전체에게 적용하게 된 것이다. 보통 20분 정도의 알람을 정해놓고 상담했었고 시간이 울리면 하던 이야기를 멈추었었다. 상담 시간의 길고 짧은 것을 아이들이 서로 비교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취했던 나만의 방법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까’를 상담하기 전에 고민했었다면, 학생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것’이 상담의 기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어, 말하기보다 듣는 것에 집중하려고 애쓰고 있다. 물론 잘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가끔은 생각한다. ‘나도 상담받고 싶다’고…. 또 상담받으려면 누구에게 찾아가야 할지, 학생이라면 나 같은 선생님을 찾아오고 싶은지, 나 같은 학생이 찾아오면 무슨 말을 해 줄 것인지 등등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아쉽게도 상담받고 싶은 사람은 아직 찾지 못했고, 학생이라면 ‘나 같은’ 선생님은 무서워서 찾아오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만약 ‘나 같은’ 학생이 찾아오면 선생님 입장에서도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여기서 ‘나 같은’은 무슨 뜻일까…. 선생님으로서나 학생으로서나 ‘좀 어렵고 편하지 않은 상대’라는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그걸 알고 있는 나는 이런 분위기를 한껏 이용하고 있지만 말이다. 누군가 나에게 쉽게 다가오고 편하게 대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오랜 학교생활을 하면서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의외로 (어려운 상대인 듯한) 나를 찾아오는 학생들이 좀 있다는 것과, 의외로 (불편한 상대인) 나에게 이런저런 깊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A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B에게 했더니 B가 놀라면서 말했다.     


 - 그런 이야기를 밥먹으면서 그냥 했다고?

 - 네….



  그러니깐…. A는, C는,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왜 했던 것일까…. 사실 나도 궁금하다. 그런데 D가 말했었다.     


 - 너랑 이야기하면 마음이 그냥 열려지던데….

   뭔가 안정된 것이 느껴져….      


  그리 많지 않았던 그들에게, 나에게 자기의 깊은 속 이야기, 인생이야기를 해 주었던 그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전해 본다. (읽는 사람은 불편할 수 있을텐데) 나도 모르는 나의 어떤 점이 있기는 한가 보다. 아마도 내가 해 주는 (어설픈) 말보다, 그냥 가만히 들어주는 것에 마음이 열렸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은, 그다지 해 줄 적당한 말이 없어서 가만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일텐데….     


  신기한 것은 내가 상담해 주던 학생에게 해 주었던 나의 (어설픈) 말이 가끔 떠오를 때가 있다. 내가 알고 확신하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순간에 해 줄 수 있었던 어떤 말이었을텐데, 학생은 기억하지도 못할 말이 갑자기 생각날 때가 있다.     


 - 생각하지도 않은 일이 생겼다고, 네가 하고자 했던 일을 멈추지 마!      


  갑자기 생긴 어떤 일로 상심하며 울고 있는 E에게 해 주었던 말이었다. 그 일 때문에 행사에서 빠지겠다는 E에게 내가 말했었다.     


 - 생각하지도 않은 일이 생겼다고, 네가 하고자 했던 일을 멈추지 마!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말고!

   그냥 하던 일을, 하고자 했던 일을 계속해!

   그럼, 그 일은 그냥 지나가고 잊혀지고 감정도 정리될 거야!

   그 감정 속에서 헤매지 말고, 빠져나와!     


  감사하게도 E는 그 감정에서, 그 혼돈 속에서 잘 빠져나와서 똑똑하게 잘 지내고 있고, 가끔 스치는 나에게 말해 준다.     


 - 선생님! 그때 감사했어요! 그 일 때문에 행사에서 빠졌으면 후회할 뻔했어요! 잘 지낼게요!     


  그때 내가 해 주었던 말이 지금 왜 생각나는걸까…. 내가 나에게 상담을 받는다면, 나 스스로에게 저 말을 해 주고 싶은 걸까….     


 - 생각하지도 않은 일이 생겼다고, 네가 하고자 했던 일을 멈추지 마!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말고!

   그냥 하던 일을, 하고자 했던 일을 계속해!

   그럼, 그 일은 그냥 지나가고 잊혀지고 감정도 정리될 거야!

   그 감정 속에서 헤매지 말고, 빠져나와!    

 

  ***********************     


***어쩌면 이렇게 의젓하게 잘 컸을까 싶은 21기 F가 찾아왔다.     


  힘들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늘 씩씩하고 건강했던 F를 늘 살폈었고 그걸 아는 F는 다정하게 나에게 잘 달라붙었었다. 학교에 다닐 때나 졸업해서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예쁘고 건강한 모습으로 이번 주에 찾아왔다. 취직을 했다면서. F가 말한다.     


 - 선생님! OO 부근에 사시죠?

 - 선생님! OO 코너를 돌아서 가시죠?     


  진짜 깜짝 놀랐다. 내가 어디에 사는지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다시 물었다.   

  

 - 맞아! 어떻게 알아?

 - 제 직장이 거기 3층 건물에 있거든요!

   선생님을 뵌 것 같아서요!     


  나는 더 깜짝 놀라며 물었다.     


 - 나를 평일에 봤다면 방학이었나? 

 - 네! 그랬던 것 같아요! 

 - 그럼 내 몰골이 어땠을지 걱정인데….

 - 핑크핑크 하셨어요!

 - 앗! 진짜?? 그럴 리가…. ㅠㅠㅠ     


  이 말을 여동생님에게 했더니 이렇게 말한다.     


 - 제발 평상시에도 잘 입고 다녀!



  건강하게 잘 자란 F의 이야기를 가족에게 하면서 왠지 내가 키운 듯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가져온 빵을 쉽게 먹을 수 없었던 이유는 8년 전의 그녀를 좀 더 음미하기 위해서라고나 할까….      


  F는 어떻게 이렇게도 건강하게 잘 자랐을까….      


  아마도 그 모든 것에서 빠져나와서 자기 일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상담  #My_Life  #들어주기  #멈추지_말기  #하던_일_계속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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