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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vecin Feb 10. 2024

* 지나가 버리면 그만이죠 (2024.02.10.토)*

지나가 버리면 그만이죠 (2024.02.10.) *     


 - 지나가 버리면 그만이죠.

 - 앞의 내용을 듣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지 말아요.     


   아침 출근길에 듣는 라디오 음악프로그램 A의 DJ B가 가볍게 툭 던진 저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그가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 지나가 버리면 그만인 거죠.

 - 듣지 못한 과거에 대해 궁금해하지 마세요.     


   B는 이렇게도 말했다.     


 - 라디오는 일회성입니다. 재방송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죠.

 - 그래서 좋아요, 라디오는!     


   대부분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그렇듯,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 동안 진행되는 A 프로그램이 단 한 번으로만 끝나버린다는 것이 시원할 수도 있겠지만, 심혈을 기울여서 시나리오를 작성한 라디오 작가의 입장에서는 무척 섭섭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이나 녹음으로 남지 않는 단발성 프로그램이어도 멘트 하나 때문에 밤을 새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면서 고민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니 그 시간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행여 실수하더라도 다시 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지만, 왠지 아쉽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에는 유O브로 ‘보이는 라디오’로서 선보이는 경우가 많다. 라디오란, 소리만으로 궁금증을 자아내고 상상하게 해 주는 장점이 있는 것인데, 보여준다는 방식의 전환이 ‘신비감’을 사라지게 해 주는 것 같다. 밤 10시에 아주 굵고 낮은 목소리로 C 음악방송을 묵직하게 진행하는 D를 TV 뉴스 프로그램에서 보고 목소리와 연결이 되지 않아서 고생했다. 목소리만 알고 있었을 때가 훨씬 좋았으니까.     


   유O브로 방송이 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보니, 일회성으로 허공에 사라지는 기존 라디오 프로그램이 아니라, 나중에 찾아서 볼 수도 있는 저장용 라디오 프로그램이 된 것도 다른 측면의 장점이 된 것 같다.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일회성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좋을까, 아님, 다시 찾아서 볼 수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좋을까. 진행자들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다.      


   오래전 E의 집에 놀러 갔던 적이 있다. 전세이기에 몇 달 뒤 집을 옮겨야 했지만, 거실의 가구를 재배치하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집을 멋지게 꾸며놓았다. E는 말했다.     


 - 내일 이사를 하더라도 오늘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예쁘게 해 놓고 싶어요.     


   ‘내 집도 아니고 곧 옮겨야 하는데 굳이?’라는 생각을 하던 나로서는 선뜻 이해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찾는 E의 생활방식이 부럽기도 했다.    

 

 - 오늘 나는 죽는다.

   오늘이 나의 가장 마지막 날이다.

   오늘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어느 책에서 나왔던 이 문구를 읽으며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했던 축사가 기억났다.     


 - 17살 때부터 난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만약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던 것을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아니라고 대답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변화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눈을 뜨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하루하루가 사실은, 절대 똑같지 않은 항상 다른, 우리가 살아가는 첫날들임을 기억해 보면서, 매일 아침에는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자'라는 다짐을,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면서는 ’다음 날 눈을 뜨지 못하더라도 오늘 하루를 후회 없이 살았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는 것. 너무 부담스러울까.     


   지나가 버리면 그만이니 과거에 아쉬워하지 말고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 하루밖에 남지 않은 사람처럼 오늘,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 너무 가벼울까.     


   무슨 내용이었을까 놓쳐버린 지난 내용을, 스쳐 지나가 버린 사람을 궁금해하지도 연연해하지도 말고, 현재 내 귀에 들리는 라디오 내용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지금 이 시간 내 눈앞에 있는 사람에 집중하는 것처럼, 바로 지금 오늘,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마음껏 받아들여 보기.   

   

   너무 이상적일까.

   말만 번지르르한 걸까.

   할 수 있을까.


   나에게 오늘 하루만 남았다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나에게 오늘 하루만 남았다면, 누구를 만나야 할까.     


   나에게 오늘 하루만 남았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살 것 같이, 내일도 있는 사람처럼 살아도 되지 않을까.     


  ***********************     


*** 2023학년도를 마감하는 마지막 날, 종업식을 하는 날, 29기 학생들을 2학년으로 올려보내면서, 30기 신입생을 맞기 위한 교실 정리를 했다.   

  

   면접 준비, 신입생 연수 준비 이후 3번째 교실 정리를 하는 것이어서 아이들이 능숙하게 잘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교실 청소, 복도 청소, 청소도구 정리 등 걱정되는 것들이 많았지만, ‘이렇게 깔끔할 수도 있다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3층 전체를 싹 쓸어버렸다.     


   아무리 깨끗하게 해 놓아도, 하루만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교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전 11시부터 청소를 시작한 교실을 오후 12시10분부터 돌아보았는데, 최종 점검까지 하고 교무실 자리에 앉으니 오후 2시였다. 


   마지막 업무를 마치고 10시에 퇴근하기 전 교실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스쳐 지나가겠지만, 기억에서 사라지겠지만, 이날의 내 마음, 29기 아이들의 마음은 사진으로 기억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에….


   (2024.02.07.수. 오후 10시)의 교실과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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