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년 내내 1등이었어요 (2024.12.07(토)) *
- 3년 내내 1등이었어요.
‘성공’을 주제로 하는 강연을 의뢰받은 A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A가 강의하기 전 이미 쟁쟁한 강사들의 성공 스토리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화려한 강사들의 성공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A는 잠시 강의 주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미 준비해 온 주제,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가?’의 강의를 그대로 할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주제를 바꿀 것인지를 고민하던 A는 ‘성공’이 아닌 ‘실패’에 대한 주제로 바꾸어 강의를 진행했다. 다다를 수 없고 현실로 이루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먼 ‘성공 신화’를 다른 사람 이야기로 건성건성 듣던 청중은 A의 강의, ‘내가 어떻게 실패했는가?’에 환호했다고 한다. 그리고 앞서 들었던 강의 내용들은 기억조차 못했다고 한다. 누구나 경험했던 실패에 대한 공감이 특정 몇몇에만 해당하는 허구의 성공담을 이긴 것이다.
학급 담임을 할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선배들의 이야기를 우리 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었다. 1, 2년 선배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좋았고, 고3 선배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좋았고, 갓 졸업했거나 졸업한 지 한참이 된 학생들의 이야기도 좋았다. 아이들은 같은 학교를 나온 선배라는 것만으로도 좋아했고 자기들과 똑같은 고민을 했었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질문을 하라고 하면 이런 질문들을 했다.
- 야간 자기주도학습을 매일 하셨나요?
- 주말에는 몇 시간이나 공부하셨나요??
- 이성 교제는 하지 않으셨나요??
더 실제적인 것을 물어보는 일도 있었다.
- 수학은, 어느 강사의 인터넷 강의를 들으셨나요??
- B 선생님의 C 과목을 신청해도 되나요??
- 수능은 몇 등급을, 내신 평균은 몇 등급이었나요?
선배들은 내 눈치를 보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했다.
- D 사이트의 E 수학 강사의 F 강좌를 들으세요!
- 이성 교제는 걸리지 않도록만 하면 되는 거, 알죠??
- 1학년 때는 공부하지 말고 실컷 노세요!
- 야간 자기주도학습, 저는 하지 않았습니다.
- 국영수 이외의 과목은 신경 쓰지 마세요!
아이들에게 선배를 소개할 때, 학교, 학과 그리고 그 아이의 장점이나 특징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는데, 몇 년 전 G를 소개할 때의 일이다. G를 이렇게 소개했다.
- G는, OO기, I 대학 의과대학 2학년으로 전교 1등이었고 어쩌고저쩌고~
아이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G를 바라보았고 G는 주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 대부분 맨 처음에 치르는 다트고사(입학 전 실시되는 교내 시험) 등수 때문에 충격을 받지만, 저는 괜찮게 나왔었습니다. 1학년 때도 1등이었고, 2, 3학년 때도 1등이었어요. 3년 내내 1등이었습니다. I 대학교 의과대학에 수시로 합격하여서….
‘태생부터 1등이었고 흔들림 없이 1등이었으며 별로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성적은 늘 1등이었다’라는 식의 G의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의 눈빛이 점점 흐려지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G의 이야기는 평범한 아이들에게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는 신화적인 이야기였던 것이다. 약간은 썰렁한 분위기의 G의 이야기가 끝난 뒤, 함께 온 H를 소개했다.
- H는 G와 같은 기수로 재수하여서 J 대학교 K 학과 1학년입니다.
재수생으로 상위권도 아닌 중위권인 J 대학교에 다니는 H의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눈빛은 오히려 더 생동감이 있었고 반짝거렸다. H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아이들이 더 좋아했다.
- 고1 야간 자기주도학습 시간에 몰래 PC방에 갔었다가 L 선생님(나)에게 걸려서 무지 혼났었는데, 고3 때도 PC방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지금은 없는) 철조망을 넘어가다가 무릎이 깨졌었어요. 컴퓨터 게임을 끊으셔야 합니다! 결국은 재수했죠.
아이들은, 고3 때도 컴퓨터 게임에 빠져서 PC방을 들락날락했다는 H의 이야기를 재미있어하면서 재수 생활 이야기에 푹 빠졌고,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했다. H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 고등학교 때 연애하던 아이들은, 재수하면서도 연애하더라고요. 그러니, 잘 될 리가 있겠어요. 연애도 깨지고, 결국 삼수생이 되는 거죠.
일류대학 의과대학에 다니는 전교 1등 출신 G에게서는 그다지 감흥이 없던 아이들이, 재수생으로 중위권 대학에 겨우 붙은 H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적어도 3가지는 배운 것 같았다. ‘컴퓨터 게임을 절제하자. 이성 교제도 절제하자. 재수는 힘든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M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그가 오래전에 이혼했다는 내용이었다. 문학가 집안에서 글쓰기에 전념하여 온 M이 결국은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는 흠결 없는 이야기보다, (요즘은 더 이상 이야깃거리도 안되는) 이혼했다는 것이 그녀 특유의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아주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2025학년도 수능 성적표도 배부되었다. 만점자가 11명이나 나왔을 정도로 시험이 쉬웠다고 하니 성적표를 받아 든 수험생들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떨어진 표준점수, 백분위와 등급에 깜짝 놀라지 않았을까 싶다. 또 2024년도의 2학기 2차 지필고사도 끝났다. 이 시험도 대체로 쉬웠던 것인지, 일단 아이들의 얼굴이 가볍다. 시험이 쉬우면 1개를 틀려도 등급이 잘 나오지 못하지만, 시험이 어려워서 자기 자신을 자책하면서 울고불고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수능 성적표를 받아 든 수험생들과 올해의 모든 시험을 끝낸 고등학교 1, 2학년 학생들 모두 그토록 기다리던 12월 첫 번째 주말, 제법 쌀쌀해진 이번 주말을 어떻게 보내고들 있을까.
좋은 성적이 나와서 원하던 곳에서의 합격 소식이 있더라도 몸과 마음을 낮추기를. 지금의 합격이 인생의 최종 성공인 것은 아니니까. 성적이 좋지 못해서 미래가 걱정되고 고민이 되더라도 절망하지 말기를. 지금의 안타까움이 인생의 실패를 말하는 것은 아니니 잠깐 털썩 주저앉더라도 가능하면 빨리 털고 일어나기를. 머지않아 성공의 열매를 맛보게 되고 누군가에게 당신의 이야기가 큰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으리니, 너무 오래 앉아있지 말기를.
완벽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바라보며 나의 삶 또한 그렇게 반짝거리는 성공의 삶이기를 소망하지만, 때로는 부족하고 흠 많고 울퉁불퉁하고 비어있어서 뱉어버리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씁쓸한 실패의 기록이 우리에게 또는 다른 이들에게 큰 위로를 주기도 한다는 것이 신비한 인생의 법칙이다. 그래서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살아보는 매일매일의 삶을 노심초사 두려워하며 두드려가며 한 발짝씩 내딛는 우리의 유리 같은 삶이 가능하면 작은 성공의 기쁨들로 좀 더 많이 채워졌으면 하는 바람을 역시나 가져본다. 다른 이들에게 큰 감동은 주지 못해도, 버거운 오늘을 살아내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 감동하고 싶으니까….
오늘 하루를, 이번 주를, 2024년 올 한 해를 지금까지 살아온 나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남아 있는 한 달, 12월도 잘 살아가 보자. 힘을 내기를 모두. 어쩌면 엄청난 성공 신화가 될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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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 학급 복도에 있는 화분.
복도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화분을 보고 깜. 짝. 놀랐다.
- 화분 하나를 여기에??
다른 화분들 속에 묻혀있는 또 하나의 화분이 아니라, 유일하게 홀로 존재하는 단 하나의 화분이었다. 약해 보이지만 전혀 약하지 않은, 꼿꼿하게 서있는 단 하나의 화분! 그래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주변에 다른 화분이 없더라도, 또 풍성하지 않더라도 고고하게 잘 자라기를!
외로워 보이지만, 그래서 더 강해 보이는, 홀로 있기에 빛이 나는 것 같은, 그래서 더 감동적인, 그래서 위로가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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