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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연 - 4 *

by clavecin

* 인연 - 4 (2025.02.22.(토)) *


- 내년에 A 업무를 맡아 주겠어요??


행정적인 학교 업무는 매해 3월부터 2월까지이지만, 대부분의 일은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12월 말이나 1월 초면 거의 정리가 된다. 또 새로운 일을 진행하지 않고 정리하는 시기이기에 마지막으로 갈수록 일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1학년은 전년도 11월경부터 새로운 학년을 준비해야 하고, 12월 중순부터 말까지는 학년 행사가 빼곡하게 있으며, 해를 넘긴 1월 초에는 아직 입학하지 않은 신입생 대상 연수가 있고, 현 학년 학생 업무도 꼬박 2월 말까지 책임져야 하기에, 숨을 돌릴 틈이 없다. 현 학생들과 모든 것을 끝내고 헤어지는 ‘종업식’ 이후에도 2월 말까지는 현 담임 선생님이 책임을 져야 한다. 2주 전에 종업식을 끝내고 봄방학 기간 중인 이번 주에 B 선생님이 말한다.


- 선생님! 저희 학급에 학적 변동이 있을 것 같아요. 상담해 주실 수 있나요??


이미 위 학년으로 진급하여 새로운 학급으로 배정이 되었건만 이런저런 변화가 있는 경우가 많아서 생소한 일은 아니지만, ‘아! 이제 끝났다!’라고 말을 할 시간은 아니다. B에게 말했다.


-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도 끝난 게 아니네요.*^_^*….


2020년 10월 말경, C에게서 전화가 왔다.


- 내년에 A 업무를 맡아 주겠어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A 업무를 권하는 C의 전화를 받고 놀라면서도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니, 기도해 보겠다고 했던가? 아마도 그때는 좀 더 신실했으니 그렇게 답했을 듯하다.)


그다음 날 C를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


- 저는 A 업무가 어떤 일인지도 잘 모르고, 지금까지 전혀 생각하지 않던 일입니다. 가르쳐 주시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C는 이렇게 말했다.


- 도와줄게요.

- 그럼, 딱, 1년만 해 볼게요.

- 기본이 2년인데??


C와의 만남 뒤 곧바로 D를 찾아가서 말했다.


- D! 내가 내년에 A 업무를 하게 되었는데요, D가 나를 도와서 E 업무를 맡아 줄래요?


D는 0.1초의 주저함도 없이, 두 눈을 크게 뜨고 큰 목소리로 즉각 대답했다.


- 네!!!


도와주겠다는 C의 말과 D의 또랑또랑한 대답에 힘을 얻어서, 2020년 10월 말부터 시작되었던 A 업무가 공식적으로 2025년 2월 말에 끝난다. 1년만 하고자 하였으나 2년을 하게 되었고, 그만두려고 하였으나 이리저리 숙고하다가 다시 1년을, 또다시 어찌어찌하다가 1년을 더 하여 총 4년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길고 긴) 4년을 살아왔나 싶다.

2021학년도 27기, 2022학년도 28기, 2023학년도 29기와 2024학년도 30기까지의 학생들과 학부모, 담임선생님들과 매년 관련 부서들과의 협업, 그리고 관리자분들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고 호락호락한 것이 없었다. 며칠 전에는 총 8명에게 전화하고 재차 확인까지 하고 나서야 한 줄짜리 짧은 공지를 하기도 했다. 언젠가 F에게 말했다.

- A 업무를 하면서 비굴(?)해지는 것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나 혼자만 잘하면 되는 일이 아니니까.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하고 협조를 구해야 하고, 싫은 내색도 못하고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받아치지도 못하고, 꾹 참고. 일이 되게 해야 하니까.


어제 오전에 G가 물었다.


- 이제 A 업무를 하지 않게 되어서 마음이 가뿐하죠?


오후에는 H가 같은 질문을 한다.


- 선생님! 이제 홀가분 하시죠?


‘홀가분? 글쎄….’라는 생각을 하며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에게 I가 말한다.


- 아, 그래도 이제는 전체를 보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이 가벼우실 것 같아요. 이제 좀 쉬세요.


학급 담임을 하면서 우리 반 아이들을 온전한 ‘내 제자’로 남기게 되고, 다른 학급 아이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었으며, 함께 했던 담임선생님들과도 끈끈한 동질감을 얻었던 것이 큰 기쁨이었다. 그래서 A 업무를 하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 내가 맡았던 1학년 전체 녀석들을 더 기억나는 제자들로 남길 수 있겠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그 덩어리가 더 커질 수도 있겠구나!

- 또 담임선생님들과 더 좋은 관계가 되지 않을까?

- 그리고 다른 부서와도 서로 잘 이해하게 되고 잘 도와주면서 멋진 교직 경험이 될 것 같아!


도대체 나는 이런 (허황되고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을, 왜, 어떻게, 계속하고 있었던 것일까??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도 참 어린아이 같고 순진했다는 생각이 든다. 글쎄 뭐라고 할까. A 업무를 맡았었던 4년은 참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웠고 뿌듯하고 내 인생에서 뚜렷이 기억될 만한 돌이킬 수 없는 사건들과 각인되어 버린 온갖 만남과 감정들로 가득 찬, 놀라운 시간이었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무언가를 질문한다면 흔쾌히, 즉각 대답할 수 없어서 깊은, 슬픈 생각에 빠진다는 것이 서글프다.


- 기억될 만한 제자를 남겼는가?

- 기억될 만한 스승이 되었는가?

- 내가 맡았던 기수 아이들이 1학년을 기억하는가?

- 함께 했던 담임 선생님들과는 돈독했는가?

- 즐거운 시간으로 기억되는가?

- 함께 했던 다른 부서 선생님들과는 가까워졌는가?

- 기억될 만한 A 업무였는가?

- 내가 맡았던 A 업무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는 일인가?

- 혹시, 지속되지도 않을 일에 4년의 세월을 쏟아부었던 것인가?

- 왜 이 일을, 4년 동안이나 했던 것인가???

- 그래서, 누군가를 남겼는가??

- 그래서 너는, 이전보다 나아졌는가? 발전했는가?

- 결국, 무엇을 남겼는가???

- 너는, 열심히 살았는가?


수도 없이 많은 질문이 쏟아지지만,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질문뿐이다.


- 그래! 나는, 열심히 살았어.

- 기억될 만한 제자도 없고, 스승으로도 남지 않았고, 담임 선생님들도, 타 부서 선생님들과도 친밀해지지 못했고, 내가 4년 동안 했던 일은 남긴 것도 없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사라질 것이고, 나 자신이 전혀 발전하지도 못했지만,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그리고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 그리고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어제 J에게 이렇게 툴툴거렸다.


- 너무 힘든 시간이었어요.


원래 인생은 그런 것이라는 듯이 J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했다.


-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2020년 (1-10) 담임을 한 이후로, 오랜만에 하는 담임이기에 베테랑 선생님들에게 계속 말했다.


- 선생님! 제가 오랜만에 담임을 하는 초보 담임이니,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


베테랑 K가 말했다.


- 오랜만에 하는 게 더 좋을 거예요. 새롭고 신선하니까.

- 그러겠죠??


2025년 1월 15일에 학급 카페와 학부모 카페를 새로 만들면서 2025학년도의 1학년 담임 일을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신입생 학급 학적이 발표되자마자 아이들에게 연락했을 텐데, 올해는 좀 천천히 가자는 생각으로 발표 후 일주일이나 지난 어제에서야 아이들에게 연락했다.


- (2025 - 31기) (1-*) 학급 방입니다.


새로운 위치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시작하는 2025학년도. 제일 먼저, 나와 같은 배를 타게 된 우리 반 30명의 학번과 이름을 하나하나 직접 작성하면서 아이들과의 시간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올해 맺게 되는 새로운 인연들을 기쁜 마음으로 마음껏 기대해 보아도 될까.


*******************


***언젠가 L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 시간이 가도 사람은 남던데요.


나는 그 말에 반기를 들었다.


- 아뇨. 시간이 가면 일이 남던데요. 사람은, 없더라고요.


2021학년도부터 2024년까지 계속했던 일 중의 하나는, 매 학기 <주말 편지>를 제본하여 학교와 학교 도서관 송백재에 남겨 놓는 것이었다. 내가 떠나더라도 내가 했던 일을 허공으로 날리지 않고 눈으로 볼 수 있게 남겨 놓고 싶었다. 물론 이번에 폐지를 버리는 등 교무실 정리를 하면서 M이 이렇게 말해서 나에게 한 대 맞기도 했다.


- 이 <주말 편지>를 버려야 하나?


매 학기 제본하던 <주말 편지>와 달리, 이번에 떠나기 전에 꼭 하고 싶었던 일은 <선배 이야기>를 책으로 묶는 일이었다. 30여 년 동안 담임을 할 때마다 학년말에 후배들을 위해서 <선배 이야기>라는 것을 쓰게 해서 후배 아이들이 보게 했는데, A 업무를 하면서도 학년 아이들에게 진행하던 프로그램이었는데 파일 형태로만 있었기에 ‘꼭!’ 책으로 묶어야겠다고 계속 다짐하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2024학년도만 하더라도 1학년, 2학년과 3학년까지 총 53명이었으니, 2021년, 2022년, 2023년 그리고, 2020년 이전까지 하면 분량이 너무도 방대했다. 일정 형식을 가지고 편집해야 했는데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번 내 마음속에 들어온 <선배 이야기> 제본 건을 꼭 해내야겠다고 다짐했고, 1월 겨울방학을 하면서 10여 일을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편집하고 제본 작업까지 마치게 되었다.

총 5권의 책으로 묶어서 학교 도서관인 송백재에서 열람하게 하였고, 특히 2024년도 것은, 31기 신입생 각 학급에 배부하여 교실에서 아이들이 돌려가며 볼 수 있도록 했다.

내가 보낸 4년을 돌아보는 질문 중 하나.


- 결국, 무엇을 남겼는가???


대답해 본다.


- 책! 책을 남겼어요.

- 사람은, 없지만요.


* 학교 도서관 <송백재>에 전시된 <주말 편지>와 <선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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