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은 청산유수던데 (2025.11.01.(토)) *
- 말은 청산유수던데.
학교에서 흔히 있는 일이 있다. 쉬는 시간에 노래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A 학급에 대해서 각 선생님의 평가가 다른 것이다.
- 지금 떠는 학급이 A 학급인 것 같은데요?
- 진짜요? 저 녀석들은 내 수업 시간에는 대답도 안 하고 너무 조용한데?
- 그래요? 제시간에는 완전 시끄러운데?
- 뭐야! 내 시간에는 눈만 끔뻑끔뻑하고 있는데.
- A 학급, 완전 말괄량이던데요?
- 귀여운 아이들 아니에요??
언젠가 선생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 B는 참 괜찮은 아이인 것 같아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 그래요? 어떤 아인가요?
- B가 수업 시간에 발표했는데, 어쩜 그렇게 말을 잘하던지!
- 어떤 내용이었는데요?
- 생각이 참 깊더라고요! 요즘 아이들 같지 않았어요.
- 아, 그래요?
- 그렇게 말을 잘하다니, 참 괜찮은 아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 음, 말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그런가요? 이모저모 보았을 때 정말 마음에 드는 아인데. 말을 너무 예쁘게 하더라고요.
- 말을 예쁘게 하거나 잘 한다고, 또 글을 잘 쓴다고, 그게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저도 그런 것에 혹했던 적이 많았지만, 실제는 좀 다르던데요.
- 그럴 수도 있겠네요.
- 말도 좋고, 글도 좋지만, 행동이 다른 경우가 많더라고요.
-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 제가 C 작가의 글을 좋아해서 그의 글들을 모아놓기도 했지만, C 작가에 대해서 더 알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실망할까 봐요.
- 그래요?
- 글에는 그 사람의 생각과 사상이 들어가기에 그 사람의 일부인 것은 맞지만, 그것과 그 사람을 일치시키면 나중에 꼭 후회하게 되더라고요.
- 맞아요. 그래서 사람을 제대로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어요.
- 말은 말 자체로, 글은 글 자체로, 행동은 또 행동 그 자체로, 각각 따로 보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3개가 다 일치하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이상한 것이 아니고, 그게 합쳐져서 그 사람이죠. 그러니, 누군가에 대해서 기대하지도 말고, 실망하지도 않으려고요. 3개가 각각 독립체라는 걸 아는 데 오래 걸렸네요….
그야말로 생활기록부 시즌이다. 2학기 2차 지필고사를 앞두고 거의 모든 과목의 수행평가가 진행되고 있는데, 수행평가가 끝나고 마지막 정리를 하는 과목들은 과목별 세부능력 특기사항, 일명 ‘과세특’이라는 것을 작성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거나 수업 관련 프로젝트를 발표하게 되면 과세특의 내용이 좀 더 풍부해지는데, 생활기록부에서 성적 이외에 학생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영역이 과세특 밖에 없어서 아이들이나 교사나 신경이 쓰인다. 한 학기 또는 1년 치의 활동 내용을 1,500바이트(500자) 이내로 작성해야 해서 생각보다 굉장히 힘든 일이다. 제한 없이 마음껏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용을 줄여서 써야 하니까 말이다. 이 학생이나 저 학생이나 모두 열심히 활동했기에 비슷한 내용을 한가득 적어 놓게 되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정리를 하고 있다. 너무 힘든 일이다.
또 담임 선생님들은 학급 활동을 정리하면서 학급 학생들에 대한 종합의견을 작성하게 되는데, 이보다 어려운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힘이 들어가고 시간이 투자되는 일이다. 학생에 대해서 제대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그 학생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많으면 좋은데, 나와 그 학생 사이에 표면적으로 나와 있는 데이터 이외에 좀 더 많은 이야기가 있으면 내용이 풍성해지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 이외에 알고 있는 것이 딱히 없으면 그 학생에 대하여 글을 쓰기가 굉장히 힘들다. 거짓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추상적으로 쓰기도 어려우며 그렇다고 빈칸으로 두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성격이 급한 나는 일단, 일의 시작은 빠르지만, 한 명 한 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세월아~ 네월아~’하며 지지부진한 상태로 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학생들에 대한 ‘평가’를 글로 쓰는 시즌이 오면 늘 머릿속에서 이런 문구가 떠오른다.
- 지금 내가 이 아이에 대해서 제대로 보고 있는 건가?
다행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아이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한 객관적인 내용을 기반으로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데, 나만의 생활기록부 작성 기준은 이렇다. 내가 확인하고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만 쓴다, 부풀려 쓰지 않는다, 나쁘게 쓰지 않는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쁘게 쓰지 않는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학생들은 걱정하지 말기를. 나쁘게는 쓰지 않으니! 물론, 부풀려 쓰지도 않으니, 그건 조금 아쉬워해도 되겠다. 하하.
말도 잘하고 글도 좋으면서 거기에 맞춰서 행동도 따라주면 좋으련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이 3개가 동일한 색상을 나타내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이 3개 중에 가장 쉬운 것이 말하는 것일 텐데 차라리 말은 잘하지 못하지만, 행동은 좀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다. 거기에 가끔 글도 잘 쓰면 좋겠지. 내가 나를 파악하기로는 이 중에 아마 글을 쓰는 것으로 사람을 혹하게 하기가 쉬운 것 같고, 가끔 말로 사람을 넘어가게 하기도 하는 것 같으며, 무엇보다도 행동은 글이나 말을 한참 따라가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알고 있고 깨달은 것은 많으니, 말하거나 글을 쓰기는 하겠지만, 행동까지 도달하기에는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도 내가 하는 말이나 글이나 행동으로 나를 섣불리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에 얼마나 큰 오류가 있을지 가히 상상되면서 강하게 반기를 들어 본다. 나의 실수투성이인 몇 마디 말이나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온갖 것으로 부풀려진 글이나 아주 조금 겉으로 드러난 다듬어지지 않은 행동 몇 가지로 나를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가. 그것들은 나를 나타내는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한데 말이다. 겉으로 나타난 것들은, 내 안에 있는 것들, 차마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들, 너무 귀해서 밖으로 나타낼 필요 없는 것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데 말이다. 그러기에 정확하지 않은 다른 이들의 판단이나 평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아주 조금 참고할 뿐? 하하!
마찬가지로 내가 조금 알고 있는 아이들의 말이나 글이나 행동을 종합하여 아이들을 500자의 글로 요약하는 것은 손끝이 떨리는 일이기도 하다. 미래가 환한 훌륭한 인재인데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범재(凡才)로 서술할 수도 있겠고, 거꾸로 평범한 학생인데 특출한 영재로 생각할 수도 있을 듯하다. 정확히 서술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말은 청산유수(靑山流水).
- 청산유수 : 푸른 산의 흐르는 물. 말을 매우 잘하는 것.
나에게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 말이기에 이야기 중에 나온 저 문구에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찔리는 부분이 있어서인지 지금까지 내내 기억에 남는다. 청산유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말을 내세우며 아이들 앞에 서니까. 또 말뿐만 아니라 몇 줄의 글로 청산유수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니까.
말이나 글이나 행동이나, 청산유수같이 하지 말자. 말을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자. 글도 너무 잘 쓰려고 노력하지 말자. 행동도 그냥 편하게 하자. 애써 만들지 말자.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고 평가받는 것이 이제는 지치니까.
생활기록부의 종합의견이나 과목별 세부능력 특기사항이 나를 다 나타내주지 않는 것은 자명하니, 너무 신경 쓰지 말자. 글자 몇 줄이 나를 다 표현할 수 없으니. 또 모든 아이가 온통 부풀려진 칭찬 일색으로 가득한데 그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몇 명을 뽑는다는 것이 더 신기하다. 도대체 어떻게 구별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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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플 시간의 대표 기도는 성가를 하는 학급의 담임 선생님이 맡게 된다. 그래서 우리 반이 성가를 했던 (2025.09.12.(금)) 채플 시간의 대표 기도는 담임인 내가 하게 되었다.
‘무슨 내용을 쓰고 싶은가?’라는 생각을 정하고 글을 쓰는 것처럼, 기도문을 쓸 때도 같이 기도하고 싶은 내용을 미리 생각하고 작성하는데, 이번 기도문에는 유독 쓰고 싶은 문구들이 있었다. 이런 내용들이었다.
- 친구들 앞에서는 밝게 웃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지내고 있어서, 별일 없이 잘살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 하나님….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첫 모습보다 헤어지는 마지막 모습이 우리의 진짜 모습임을 확인하며~
- 이제는 세상에 나가서 <Made in 동산>의 작품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이토록 치열했던 동산에서의 배움이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서의 짧은 삶을 꿈꾸는 데 그치지 않기를, 아프고 버려지고 무너진 곳을, 치료하고 닦고 세우고 생명을 주는, 가치 있는 삶을 위한 귀한 밑거름이 되기를~
그런데 사실 가장 시간을 많이 들이고 수정했던 것은 이 문구였다.
- 연그린의 푸르름으로 움트는 핑크빛 봄, 붉게 타오르는 불꽃 열기로 가득한 여름, 점점 짙어지는 커피색으로 충만한 가을과 묵직한 흑회색으로 가라앉는 겨울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오묘하심과 경탄할 만한 섭리를 배웁니다.
- 연하늘빛 색상을 내뿜는 새벽녘의 안개와 오렌지빛으로 치장한 점심의 태양과 부끄럽게 반짝이는 저녁별을 품은 보랏빛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롱하심과 위대하심과 섬세하심을 배웁니다.
대표 기도를 하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눈물과 콧물이 나와서 감정을 추스르느라 힘들었는데, 내 기도를 듣고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이 함께 울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기도가 감동적이었다며 기도문을 달라는 D 목사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 기도문이 제가 아니라는 것은 아시죠.
* 이미지로 만들어진 기도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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