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라는 계절은 (2021.09.04.토) *

by clavecin

* 너라는 계절은 (2021.09.04.토) *


아주 오래된 옛날이야기 몇가지..


아마도 초등학교 6학년 즈음이었을 듯 하다. 교회에서 알던 (아주 잘 생긴) 중학생 오빠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내 손에 카드 한 장을 쥐어주고 갔다. 와서 펴보니 영어 몇 마디가 적혀 있었다.


- I Love You.

Do You Love Me?


‘Love’라는 단어에 깜짝 놀랐던 것 같고, ‘이게 무슨 말이야?’라는 어벙벙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한참 뒤 성인이 되어 미국에서 한국에 방문했던 그 오빠와 반갑게 인사하면서 나는 기억 속에 있던 이 카드를 떠올렸지만, 정작 당사자는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그가 기억했었더라면 얼마나 어색한 분위기였을까..


초등학교 6학년 때(왜 이때 일이 많았지..??) 우리 반 반장 L을 내가 무척 좋아했다. 특별한 학생은 아니었는데 까무잡잡하고 반짝거리는 눈이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얌전한 학생이었던 나는 속으로만 좋아할 뿐이었고 1년 동안 좋아만 하다가 잊었다. 3년이 지난 뒤 개교 2년 차인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는데 S대 출신 음악선생님이 의욕적으로 만드셨던 합창반 동아리에서 L을 다시 만났다. 아.....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13세의 모습에서 키가 훌쩍 커 버린 17세의 L의 모습은 진짜 짱이었다. 여전히 까무잡잡한 피부에 반짝거리는 눈이었다. 그를 합창동아리에서 만나다니.. 나는 반주자로 그는 테너로 1년 동안 합창반 활동을 같이 했는데,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몇몇의 친구만 알뿐이었다.

L은 얌전한 학생이었고 공부를 잘했으며 노래도 잘했다. 남녀가 분반되어 있었던 학교에서, 소식통인 친구들은 L에 대한 소식들을 새침데기인 나에게 달려와서 전해 주었다.

- L이 어느 선생님 시간에 이문세의 ‘소녀’를 불렀대..

- L이 방금 매점에 나타났대..

- L이 OOO에서 누나랑 엄마랑 산대...


내가 이문세의 ‘소녀’를 수천번 들었던 것도, 이문세 이름만 들어도 L을 생각했던 것도, 매점에서 그의 머리카락이라도 잠깐 보려고 매일 매점에 달려 내려갔던 것도, 그가 사는 OOO지역을 거쳐서 집에 왔던 것도, L때문이었다.


그 때의 내 수첩에는 이런 글들이 적혀 있다.


- 오늘 매점에서 L의 뒷모습을 봄. 기분이 좋음.


K대학교에 진학한 그와 학보를 몇 번 주고 받다가 연락이 끊어졌는데, ‘아이러브스쿨’이라는 곳에서 다시 만나 한동안 연락을 했었다. 웃는 모습이 반짝거린 L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찍혀있던 합창반에서의 사진들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중학교에 진학해서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역시나 속으로만 좋아했던 J 오빠가 있었다. 교회에서 회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오빠였는데 6년 내내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오빠를 좋아하던 아이들이 많았었고 내 친구도 그 오빠를 좋아했다. 역시 나는 얌전한 학생이어서 속으로만 좋아했었고 그 오빠는 그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내가 대학교에 합격하고 2월에 그 오빠에게 연락이 왔다. 완전 깜짝 놀랐다. 누군가에게 들었다면서....


이상했던 것은, 6년 동안 엄청 좋아했었는데 딱 한번 만나고 나니 마음이 완전 식어졌다는 것이다. 더 놀라웠던 사건은, 대학교 입학해서 3월에 전공 수업을 듣고 있는 내 강의실로 그 오빠가 찾아왔다는 것.... 교수님과 우리 과 아이들이 모두 놀란 상태였고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음대 식당 뒤편에서 ‘도대체 오늘의 이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날로 나의 마음에 쪼금 남아있던 감정은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이 사건은 나에게 굉장히 큰 사건이었는데, 6년 동안 짝사랑 하던 마음이 2번의 만남으로 깨끗이 정리될 수 있다는 경험은 굉장히 놀라웠다.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혹시 이런 경험이 있으신지???


작곡과에는 음악을 좋아하는 S대 다른 학과 학생들이 청강을 하거나 직접 수강을 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또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해서 S대학에 다니고 있음에도 그만두고, 실기 레슨을 받고 아예 학력고사(지금의 수능)를 다시 치루어서 작곡과로 진학하는 경우도 많다.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경우는 더 많고.

그 중에 지질학과를 아예 졸업하고 다시 작곡과에 입학했던 K오빠도 있었다. 대학원이 아니라 대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고 중대한 결정이었기에 이 오빠의 결정에 모두다 신기해했다. 내가 이렇게 질문했었다.


- 왜 음악을 다시 전공하려고 하신 건가요?

- 음악이 좋기 때문이지..

- 음악을 배워서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건 아니구요??

- 아니...무언가 배워서 꼭 써먹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배움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우리는 이 지점에서 설전을 벌였다. 학문을 배웠으면 실용적으로 써먹을 수 있어야지, 그냥 배우기만 하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뭐 이런 내용으로 열띤 토론을 했던 것 같다. 음악을 음악 자체로 좋아해서 인생을 거는 전공으로 택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대단했었다. 그때까지는 별 의미없이 좋았었는데...


K오빠가 나에게 계속 선물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잘 몰랐었다. ‘선물을 자주 주는군’ 정도... 그런데 계속 선물을 하는데, 집으로도 보내고 내 손에도 들려주고... 한때는 계속 책 선물을 하면서, 집으로는 책 전집을 보내주기도 했다. 정갈한 편지와 함께.


난 그 때 알았다. 이렇게 똑똑하고 예의바르고 좋은 사람인데 마음이 전혀 안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받았던 편지와 선물을 계속 돌려주기가 벅차오면서, 책은 받자마자 엄마에게 드렸었고 편지는 접어서 보관하기로 했다. 그리고 서로간의 모든 상황이 어느 순간에 정리가 되었다. 그는 잘 살고 있을까...음악을 하고 있는지..아님..

노력을 한다고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노력을 한다고 누군가를 싫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노력으로 되는 것이라면..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이 노력으로 되는 것이라면...

한참 지난 옛날 일들이 떠오르는 노래를 들었다.


멜로디도 마음에 들고 무엇보다 가사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중저음의 목소리... 그리고 마음을 울리는 피아노의 반주 스타일...


바람이 달라졌다. 이 음악과 어울리는 가을로 바뀌는 중...


https://www.youtube.com/watch?v=hJc-wIkcG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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