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e the Light! (2025.11.15.(토)) *
- Be the Light!
10월경부터 수행평가 기간이다 보니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매시간 아이들 손에 책이나 프린트물이 들려 있다. 음악 시간에는 교과서와 프린트만 가져와야 하는데, 역시나 다른 교과의 책, 노트, 프린트물을 함께 들고 온다. 어느 날,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앞에 앉은 A가 B 과목 관련 도서 C를 펼쳐놓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 이 책은 뭔가요?
- 다음 시간에 B 과목 수행평가가 있어서요.
-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걸까요?
- 네!
- 다 읽었나요??
- 아, 지금 읽고 있어서….
- (모두) 하하하!
책을 다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하지만, 책을 (다) 읽지 않고도 대략적인 독후감을 쓸 수 있다고 하니 대단한 녀석들이다. 조사해 보니, 선택한 책을 다 읽은 아이들도 많았지만, 책 내용을 요약한 사이트를 참고한 아이들도 많았다. 읽었건 읽지 않았건 거의 모든 아이가 미리 독후감을 작성해 본 뒤 외우는 것 같았는데, 내용이 많아서 힘들다고들 했다. 책을 다 읽은 아이들은 책 내용이 다 기억났을까? 다 읽지 않은 아이들은 어떻게 독후감을 썼을까? 무슨 내용으로 종이를 채웠을까? A가 음악 시간에 가져온 C 책은 수업하는 동안 내가 가지고 있었기에, A가 제대로 독후감을 썼는지는 모르겠다. 걸리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바보!
음악실에 가져왔다가 놓고 간 책이나 프린트도 많아서 전 교실을 돌면서 찾아주기도 한다. 어느 날에는 뒤쪽 창가에 D 단어집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 음악실에 가져왔다가 놓고 간 것. 단어집을 펼쳐보니 내가 한참 보고 있던 E 단어집보다 훨씬 가독성이 좋았다. 글씨도 크고 시원스러워서 당장 단어를 외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질문했다.
- 단어 수행평가를 보나요??
- 네! 2,000개를 외워야 해요!
- 2,000개요?? 와우! 다 외워져요??
- 아뇨! 힘들어요!
- 시험문제는 몇 개가 나오는데요?
- 20개요!
- 20개요?? 너무 적은데요?
- 네??
- 2,000개 중에서 200개는 나와야지, 20개가 뭐예요.
- 네??
- 단어 200개는 나와야 한다고 말씀드릴게요.
- 안 돼요!
아이들이 영어 단어 2,000개를 다 외웠을까? 2,000개를 다 외운 아이들은 단어 시험에 나온 20개가 다행히도 다 기억났을까? 2,000개를 다 외웠지만, 문제에 나온 20개 중 몇 개는 기억이 나지 않은 아이도 있었을 것이고, 고작 몇백 단어 외웠지만, 어쩌면 20개를 다 맞춘 아이도 있었을 수 있겠다.
시간을 들여 공부하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서 시험을 잘 보면 좋을 텐데, 참 이상하게도 그게 딱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이대로 공부를 계속해도 되는지, 아니면 지금 이 지점에서 포기해야 하는지, 갈등하게 한다.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으니, 공부하지 않는 것이고, 공부하지 않아도 가끔은 성적이 그대로이니, 또 공부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시간을 들인 만큼 성적이 오를 수 있을까. 물론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 성적이 금방 오르지 않으니,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공부해도 별로 티가 나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아도 티가 나지 않으니. 언젠가 F의 이야기를 들었다. 1차 지필고사에서는 G 과목 시험을 같은 번호로 쭉 찍었고, 2차 지필고사 때는 몇 문제라도 풀어 보려고 애썼는데, 같은 번호로 찍었던 1차 지필고사 성적이 더 좋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H가 말했다.
- 문제를 왜 풀어. 같은 번호로 찍었어야지!
시간은 조금 오래 걸리겠지만, 공부하면 조금씩이라도 성적이 오른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말자. 또, 공부하지 않아도 성적이 그대로라고 안심하지 말자. 티가 나지 않더라도 지금, 이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공부를 조금씩이라도 해 보자.
오랜 시간을 들여 읽은 책의 내용이 머릿속에 다 남아있지 않고, 평생 영어 단어를 20,000개가 넘게 외워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는 것이 참 신기하다. 공부는, 책은, 왜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는 거지? 머릿속에 오래 남아있으라고, 그토록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서, 걸어가면서, 밥을 먹으면서, 잠자기 전까지, 불쌍할 정도로 공부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토록 금방 까먹고 오래 남아있지 않는 공부와는 달리, 사람에 대한 것은 잊으려고 해도 잘 잊히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곳에 가도, 저곳에 가도, 눈을 감고 있어도, 일을 하고 있어도, 잠을 자면서도, 다른 사람과 더 크게 웃고 떠들고 소란스럽게 있어도, 잊으려고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고 오히려 더 생생하게 또렷해지던 기억! 무언가를 잊으려면 아예 생각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니 더 생각이 나서 괴롭던 기억! 가장 좋은 방법은 몸을 쓰는 것이기에, 온 집을 뒤집어 청소하거나, 설거지하거나, 책상 정리를 하거나, 모든 것을 다 끊어보기도 하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던 기억! 지워지지 않는 그 기억 때문에 밤새 지쳐 울거나 운전하면서 울거나 혼자 있을 때 주르륵 눈물이 흐르던 기억! 모두 있지 않을까! 어떻게 견뎠을까, 그 시절을….
이번 주에 아이들 자습을 시키면서 읽었던 책, <명화의 발견 – 그때 그 사람>에 나왔던 화가 이름도, 저번 주까지 외웠던 영어 단어 하나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오래된 옛일, 그 몇몇 사람, 그 아프고 슬프고 또 때로는 기쁘고 즐거웠던 그 감정은 신기하게도 아직도 기억난다.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아, 어떻게 해야 하지. 왜 잊히지 않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해야 완전하게 없어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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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2025.11.13.(목))에 수능이 있었다. 한 번의 시험으로 12년을 결정짓는 것이 얼마나 안쓰러운 일인지. 물론 현역으로 들어가는 아이도 있지만, 재수, 삼수가 일반화된 요즘이어서, 시험을 못 봤다고 하더라도 예전처럼 크게 걱정하는 분위기는 아닌 듯하다. 잘 봤든 못 봤든, 시험을 끝냈다는 안도감이 아이들의 얼굴에 퍼져 있다. 다행이다.
수능을 보기 전 저번 주에 촛불 응원이 있었다. 매해 수능 필적 확인 문구가 화제가 되는 것처럼, 우리 학교 수능 촛불 응원 문구도 화제가 된다.
올해의 문구는 ‘Be the Light! – 빛이 돼라!’이다. 멋진 말이기는 하지만, 무척 부담되는 말이다. ‘빛’이라니!
수능을 끝내고 (2025.12.05.(금)) 점수가 나오기까지의 3주간이 여전히 긴장된 시간이지만, 하고 싶었던 일 딱 하나는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뭘 하고 싶을까? 생각해 놓은 일이 있을까?
그 작은 기쁨이, 긴 시간을 버텨온 마음을 조금이라도 밝힐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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