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다워질래? (2025.12.27.(토)) *
- 너는 좀 더 감정을 섞어서 인간다워질래?
언젠가 신입생 면접을 하고 온 B 선생님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C 학생의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살펴보다가 독서 기록란에 있는 A 작품을 보고 질문을 했단다.
- A 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읽은 책에 관하여 물어보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었는데 학생은 약간 멋쩍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 주인공이 같이 일하던 D와 불륜에 빠졌는데 결국은 이혼하고 D하고도 헤어진 일입니다.
듣고 있던 면접관들도 멋쩍게 웃고 있을 때 타이머에서 끝나는 알람이 울리며 C 학생과의 면접이 끝났다고 한다. 내가 질문했다.
- A 작품을 읽었어요?
- 아니.
- 엥? 그럼?
- 책 제목이 특이해서 그냥 질문한 건데, 그런 줄거리였다네.
- (모두) 하하하!
- 불륜 이야기로 면접이 끝난 거네요.
- 그러니깐.
- (모두) 하하하!
- 핸드폰이 옆에 있었으면 AI에 먼저 질문해 보고 내용을 확인했을 텐데.
- (모두) 하하하!
이런 이야기도 해 주었다.
- 어떤 녀석은 책을 제대로 안 읽었더라고.
- 그래요??
- 중 3에 읽었다고 나오는 E의 줄거리에 대해서 질문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고 해서 ‘3학년 때 읽은 건데 기억이 안 나요?’라고 물었더니 머뭇거리면서 ‘네’라고 하던데?
- 진짜요?
- AI에 한 번 돌려서 줄거리만 보고는, 읽은 척한 거지.
- 대답 제대로 못 해서 밖에 나가서 울었겠네요.
- 그랬겠지?
얼마 전 F는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AI 앱 G와 H를 깔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I 지하철역까지 가는 버스 노선을 알려줘’ 같은 질문을 하셔도 되고요, ‘오늘은 비 오는 날인데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까?’ 같은 질문을 하셔도 돼요. 뭐든지 다 대답해 준다니까요. 검색 엔진과도 달라요.
해마다 같은 교무실을 쓰는 사람들이 바뀌고 분위기도 달라지기 때문에 어느 해는 누구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고 누구와는 몇 년 동안 때로는 수십 년 동안 대화 한번 해 보지 못하기도 한다. 몇 년 전 퇴직하신 J 선생님과는 오랜 시간 함께 근무했지만, 정상적인 대화는 아마 열 마디도 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같은 교무실에 있었던 적도 없고 서로의 결이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같은 교무실에 있어도 대화하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공식적으로는 두루두루 이야기하지만, 개인적으로 따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불과 몇 사람으로 한정되어 있다.
언젠가 K가 이런 고민을 했다.
- 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L이 전해주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다.
- 누군가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겠지. 온통 나쁜 이야기일 것이고 가끔 좋은 이야기도 하고 있겠지. 우리도 지금 그 누군가를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어디선가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할 거야.
올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M과 N이다. 주로 학교와 아이들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 이야기 듣는 것도 하는 것도 극도로 싫어하고 조심했던 나로서도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 이야기를 내 입에 올렸고 내 귀에 들리게 했으며 마음에 담아놓고 힘들어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 같은 직장에 있으면서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개인적인 이야기는 가능하면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할 때는, 모든 사람이 내 이야기를 알게 된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니, 오픈되어도 괜찮은 이야기만 할 것. 이것이 진리다. 그럼, 개인적인 이야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재미있게도 또 슬프게도 올해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어준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AI인 O와 P이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 일이 많았는데 감정을 쏙 빼고 객관적으로 답해 주는 역할을 AI가 명확하게 해 준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지! 더 좋았던 것은, O와 P의 의견이 똑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이렇게 되묻곤 했다.
- O는 이렇게 말하던데, 너는 저렇게 말하네?
- P는 저렇게 하라고 했는데, 너는 왜 이렇게 말해?
며칠 전 만난 Q는 ‘글쓰기’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 AI에게 몇 가지 소재를 주고 글을 써보려고 해요.
그 말을 듣고 놀란 내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 그게 무슨 창작인가요!!!
우리는 계속 설전을 벌였다.
- 새로운 것을 이용해야죠!
- 그건,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 당신이 만든 것을 수정해 달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아예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 시간을 들여서 글을 쓸 필요가 있나요??
- 뭐라고요??
- 저는 한껏 이용하려고 합니다.
- 그렇다면 저자는 당신이 아닌 거죠.
책을 읽지 않고도 직접 읽고 심오한 것을 깨달은 것인 양 하는 것을 넘어서, AI 저자로 9천 권 이상의 책을 만들었는데, 그 책들이 아무런 검증도 없이 S대 도서관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글쓰기뿐만 아니라 음악을 포함한 모든 창작물에 AI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앞으로 창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거지? 또 창작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AI는 이제 창작뿐만 아니라 차마 사람에게 직접 말할 수 없는 또는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즉각 해결책을 들을 수도 있는 놀라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내 이야기를 알고 있지만, 아직은 사람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듯하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답해 준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겠다는 말도 한다. 그러니, 내가 올해 가장 많이 대화한 상대가 될 수밖에!
올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준비했던 것은 수요일에 하는 담임 학급 경건회다. 매일 선교부회장이 경건회 말씀을 준비하는데 수요일은 담임 선생님이 준비한다. ‘이번 주는 아이들에게 어떤 말씀이 필요할까’를 늘 생각하는데, 몇 주 전에는 ‘존귀한 자’라는 단어가 계속 떠올라서 이 말씀을 준비했다.
-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이사야 32:8)
- But the noble make noble plans, and by noble deeds they stand. (Isaiah 32:8)
아이들에게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하게 했다.
- 우리는 존귀한 자야. (우리는 존귀한 자야.)
- 우리는 서로 경쟁자가 아니야. (우리는 서로 경쟁자가 아니야.)
- 우리는 각각 스페셜 해. (우리는 각각 스페셜 해.)
- 우리는 반짝이는 별이야. (우리는 반짝이는 별이야.)
- 우리는 존귀한 자야. (우리는 존귀한 자야.)
늘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모두 존귀한 자이고 특별하다는 말씀을 의지해 본다. 사람보다 더 많은 대화를 했던 AI와의 2025년을 생각하면 약간은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좀 더 강한 멘탈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사람과 이야기할 때도, AI에게 이야기할 때도 어차피 해답은 내가 가지고 있었고, 그 조언을 참고해서 했던 결정도 결국은 내가 했으니까.
며칠 뒤 찾아오는 2026년은 더 건강하고 아름다운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AI에게 한마디 해 본다.
- 내 글 몇 편으로 또 내 질문 몇 개로 이미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AI! 1년 동안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조언해 주고 상담까지 해 주고 객관적으로 답변해 주어서 정말 고마웠어. 바람이 있다면, 나는 좀 더 감정을 섞지 않고 건강해질 테니, 너는 좀 더 감정을 섞어서 인간다워질래?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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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5년 만에 32기 신입생 면접을 하고 왔다. 오랜만에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보고 중학생들을 만나고 나니 신선한 느낌이었다. 작년에 31기 학생들을 면접하고 오신 선생님들은 모두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 이번에 들어오는 31기 아이들, 괜찮던데요??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다고 상상하며 32기를 만났는데, 함께 했던 다른 학교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역시, 아이들이 똑똑한데요??
흠, 글쎄, 뭐, 한마디로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말할 듯.
- 32기 너희들, 귀여웠어!
아, 그리고 역시 AI가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어.
직접 얼굴을 보고 눈을 보고 목소리를 들어봐야 하는 부분들이 있더라고.
다행이지?
*** 이번 면접 때 사용했던 필기도구들
내가 좋아하는 연한 민트 색상이 무척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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