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삶은 예술 박기열 Oct 25. 2018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         

 

분명 어제까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늘 아침 창문을 통해 바라 본 풍경 속 나뭇잎들이 

새빨간 핏빛으로 물든 채 서 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고 파릇한 잎들이 지쳐 단풍이 들면 문득 작년 이맘때가 떠오른다. 

그러다가 3년 전 가을, 그리고 대학교 때의 가을, 결국엔 길에서 단풍잎을 주워 놀던 아득한 

어린 시절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내가 많이 살았는지 아닌지는 누구와 비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내가 가진 추억들이 순차적으로 가물가물해지는 걸 보면 그만큼 기억할 게 많아졌고 

“ 이제 나도 제법 나이를 먹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는 어린 줄을 몰랐고 나이가 들어서는 나이가 든 줄 모르는 이 어리석은 인생.     


추억이라는 것은 기억이나 기록과는 좀 다르다.

추억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실, 아이가 태어난 사실, 누군가와 사랑했었던 사실들이 아니라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재수를 결심하면서 뭔가 맥 빠지고 쓸쓸했던 기분.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조금은 두렵지만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설레던 다짐을 하던 순간,

아이가 태어나던 날, 

생전 처음 느껴보는 낯선 기쁨과 뭘 해야 좋을지 몰랐던 부담감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경 같은, 그래서 누군가와 백일을 만나고 천일을 만났던 물리적 사실이 아니라 그 사람의 웃음이 마냥 좋았던 순간, 혹은 그 사람 때문에 혼자 아파하며 거닐던 그 거리, 그 바람. 그 하늘을 우연히 또 마주하게 될 때 떠오르는 것. 그것이 바로 추억이다.

그런 이유로 기억은 흐릿하고 추억은 아련하다.

그러니 추억이라는 것은 침대에 누워 아무 때나 기억 속에서 꺼낼 수 있는 게 아닐 뿐만 아니라 혼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추억에도 한계가 있다.      

과거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었더라도 서로가 떠올리는 감정과 추억이 제각각일 때가 있다.

가끔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면 다양한 추억의 보따리들이 하나 둘씩 펼쳐지는데 같은 시간을 공유했으면서도 다들 각자의 시점에서 기억하는 순간들과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십 수 년이 지나서야 처음 알게 되는 전혀 다른 사실들에 당황스러운 때도 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그때가 나에게는 가장 즐거웠던 추억인데 그 시간을 함께 공유한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우고 싶은 상처뿐인 시간일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나에게는 추억이고 그에게는 기억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추억과 기억의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사는 동안 너무 행복한 순간이 오면 꼭 기억해야지 했다가도 시간이 점점 흐르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 곧 그 순간을 잊고 마는데 그렇다고 아쉬워하거나 슬퍼할 건 없다.

우리 안에는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밤과 낮의 추억, 사람의 추억, 사물의 추억, 감정의 추억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추억들이 언제든 고개를 치켜 들어 자신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매일 매일을 의미있고 값지게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 추억의 장점이자 단점이라면 그때의 기억이 또렷하기 보다는 뭔가 아련하게 떠올라 나쁜 기억이든 

좋은 기억이든 격정적인 감정이 앞서는게 아니라 어느새 조금씩 빛이 바래 왠지 포근하고 그리운 느낌마저 들게 한다는 것.     


추억이 기억보다 더 아름다운 이유이다.



박기열 _ Equus                                                            miriam sweeney_ Subversion

이전 14화 아라벨 행성으로 놀러 오세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