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당신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 예술 감독으로 참여해 몇 달간 매달렸던 토크콘서트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누군가의 이름을 건 콘서트라고 해도 그 한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라 제작자, 연출가, 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 아이디어를 던지고 토론하고 설득하는 격렬한 기획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하나의
쇼가 완성된다.
보통 무용이나 연극처럼 예술성이 강조되는 공연을 제외하고 대중공연에서 나 같은 예술 감독을 선임하는 건 흔치 않은 경우이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이하는 이 토크콘서트는 이야기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공연으로도 정평이 나 있는데 네 번째 시즌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원했던 제작사 측에서 콘서트의 콘셉트는 물론, A부터 Z까지 전체적인 이미지를 이끌고 갈 전문가를 필요로 했고 운 좋게 모든 여건이 맞아떨어져 나에게 기회가 생겼다.
원래 공연의 아트워크는 포스터부터 무대디자인, 팬들을 위한 상품(goods)디자인까지 그 분야의 전문 업체에 외주를 주거나 업계에서 유명한 몇 사람이 도맡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평소 음악을 사랑하고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하며 평생 조형작품을 만들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왔던 나는 이 자리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처음 만나 회의를 하던 날, 나는 연출가와 작가들이 쓰는 공연 전문용어를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또 예술 감독이었지만 분위기상 아트워크뿐만 아니라 콘서트 전반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면서 이미
이 일의 베테랑인 그들에게 지금껏 없던 기발하고 신선한 영감을 주는 것 또한 나의 역할이라 스스로 규정했는데 의도는 좋으나 너무 이상적이어서 실행시키지 못한 아이디어들도 있었고 반대로 늘 학교에서 미대생들과 수업을 하며 혹은 주변 작가들과 농담처럼 주고받았던 번뜩이는 발상들이 콘서트에 고스란히 적용되기도 했다. 그중 작은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이번 토크콘서트를 기념해 나는 드로잉 한 점을 그렸는데 그 그림이 들어간 에코백을 제작해 관객들에게 선물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런데 그것을 나눠주는 방식이 너무 밋밋하고 재미가 없는 것이었다. 사실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받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기분 좋을 것이다. 그러니 나눠주는 방법이 굳이 재미있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나는 “ 정성스럽게 준비한 에코백을 더 재미있게 나눠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라며 한참 전에 지나간 안건을 속으로 계속 생각하다가 무심코 “객석 등받이에 커버처럼 씌워놓으면 어떨까요?” 라며 뒤늦은 의견을 냈는데 의외로 반응이 뜨거웠다.
조금 번거로울 수 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시도해 보지 않은 일이라 신선하다는 평이었다.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객석 사이즈를 재고 에코백 업체에 주문을 넣었다.
콘서트 하루 전날 공연장으로 엄청 난 양의 에코백이 도착했고 첫 번째 객석에 에코백을 뒤집어씌우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지며 머리를 스치는 짧은 생각 하나.
“아. 망했다.”
700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3일 간 진행하는 콘서트인데 의자 사이즈에 딱 맞게 제작돼 빡빡하게 겨우 끼울 수 있는 에코백을 무려 2000개나 뒤집어 씌워야 한다는 현실이 온몸으로 전달되는 순간 내 다리는 후들거리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일이 이쯤 되고 나니 스텝 모두 각자 할 일이 태산임에도 불구하고 맡은 일과 상관없이 객석에 달라붙어야 했다.
그러면서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
“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을까?”
“이걸 언제 다하지.”
처음 이 아이디어를 낸 순간부터 난 에코백을 발견하고 감동할 관객들을 상상했다.
아이디어를 내면서 과정에 대한 대책까지 함께 제시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결과에 취해 부수적인 어려움을 살펴볼 마음이 아예 없었는지도 모른다.
스탭은 물론, 스태프의 친지들까지 동원돼 매회 에코백으로 객석을 무사히 장식했고 그렇게 에코백이 씌워진 빈 객석의 풍경도 장관이었지만 그 결과는 내가 상상한,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두 시간 넘게 콘서트를 감상한 관객들이 공연이 끝나고 불이 켜진 후 자신이 앉은자리의 의자 커버가 에코백으로 바뀌는 마법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객석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가끔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새로운 상상력은 견고하게 결합된 기존의 규칙과 구조들을 건드려 귀찮고 불필요한 고민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 결과가 대단히 혁신적이거나 효율적이지 않다면 그들의 아이디어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소견 정도로 폄하될 가능성이 많다. 또한 조직 내에서 창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은 아쉽게도 결제권이 없는 경우가 많다. 회사 돌아가는 사정과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감히 조직의 근간을 흔들 아이디어 따위는 내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 곁엔 늘 그것을 실현시켜줄 경험과 지혜를 갖춘, 인생을 좀 살아 본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본인 스스로 창의적인 생각을 반짝반짝 떠올릴 수 없어도 괜찮다.
주변에 경험은 미약하나 새로운 생각과 열정으로 가득 찬 푸른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관찰력과 낯선 것을 받아들일 열린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들을 알아보고 중용하는 것은 결국 베테랑인 당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결국 우리에겐 창의적인 그들도,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 줄 당신도 모두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