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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 예술 박기열 Jul 28. 2019

기억을 보내며..


“아직도 나 사랑해?”      


함께 산책을 하던 아내가 뜬금없이 묻는다.

갑자기 머리가 하얘진다.  

사랑은 당연히 하는 것이고..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를 묻는 건가? 

우리가 처음 만나 사랑했을 당시의 모양과 크기만큼 사랑하는 것인지를 묻는 거라면

난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다. 

어렴풋이 느낌만 남아있는 그때의 기억을 명확히 떠올리기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고 

시간이 길었던 만큼 우리도 많이 변했으니까. 

가족과 친구도 눈에 보이지 않고 오로지 당신과 나, 우리 둘만 생각했던 때의 우리는,

변변히 가진 것 하나 없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뭐든 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던 우리는,

어느덧 우리가 길러 낸 아이들이 인생의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버린 탓에 우리의 욕망이 어딜 향해있었는지 잊은 지 오래고 이것저것 다 해봐도 우리가 가진 노력과 경험만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 있다는 걸 이미 알아버린, 어릴 적 그토록 되고 싶던 어른이 되었다.

      

음식이 상하지 않고 신선함을 유지하는 것.

인간이 늙지 않고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사는 현생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불같이 뜨겁던 지난 사랑의 기억을 애써 떠올려본다.

머릿속 생각이 몸의 힘을 따라가지 못할 만큼 흘러넘치던 에너지가 이미 내 안에 남아있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는 건 왠지 쓸쓸한 일이지만 기억을 보내준다는 것은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나에게 찾아온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난 시절 내가 가졌던 욕망은 연약해지고 주름 진 지금의 몸 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뜨겁고 강한 것이어서 그때의 사랑은 당시에만 유효할 뿐, 지금에 와선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이가 들면 우리의 사랑도 지금에 맞게 온도와 색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 역시 세월이 지나면서 좌표를 바꾸듯 위치를 이동한다.

다시 말하면 어제 품고 있던 욕망이 더 이상 오늘의 욕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혹자. 도자조각. 2001. 박기열 作


말없이 걷던 내게 아내가 짓궂게 다시 묻는다.     


“나 사랑하냐니까?”     


비록 지금은 힘이 빠져 젊었던 그때처럼 꽉 안아줄 순 없지만 가볍게 손을 잡고 같은 곳을 향해 걷는 지금,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고 눈은 어두워졌지만 마음으로 더 환하게 상대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소중한 이 순간 역시 오랜 시간을 견딘 우리에게 세월이 슬쩍 놓고 간 고마운 선물이다.     

우리가 오늘 힘든 이유는 우리의 기억이 과거의 어느 때에 멈춰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변화가 적으면 적을수록 우린 과거에 집착하게 된다.

신기술이나 새로운 문화가 영 불편하고 몸에 익지 않아 "예전엔 말이지" 를 입에 달고 사는 

초췌한 부장님처럼 말이다.

젊은 날의 기억은 그저 기억으로 간직하고 우리는 지금의 몸과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을 예민하게 느끼고 의미 있게 잘 살아내야 지나간 과거도 행복하게 간직할 수 있다.


먼 과거 속에 자신을 가둬두지 말자.

사라져야 비로소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

사라짐은 변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지금의 나를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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