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나에게 소중한 다섯 사람이 있다.
첫 번째로 내가 예술 인문학 강의를 할 때마다 항상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작가가 한 명 있는데 바로 러시아 출신의 화가 마크 로스코 (MARK ROTHKO)이다.
대형 캔버스를 서 너 가지의 색으로만 꽉 채운, 그야말로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색면(色面) 추상화의 대표 작가인 그의 작품은 복잡하고 정교한 그림이 아닌 단순하고 굵직한 그림도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예술작품으로서의 커다란 가치가 있음을 전달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예시이다.
그러면서 과거 예술의 전당에서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감상하다가 단순하지만 강렬한 색채에 정신을 잃고 졸도한 사람들의 일화를 곁가지로 말해주면 시큰둥하게 보던 사람들은 의자에서 등을 떼고 그의 작품을 다시 한번 유심히 살펴본다.
우리 주변에는 “ 나 힘들어, 나 섭섭해, 나 너무 행복해” 라며 어떤 감정이 들 때마다 구구절절 구체적인 단어들로 쏟아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끔은 마크 로스코의 그림처럼 훅 내뱉는 깊은 한숨과 옅은 미소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다 알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그리려는 대상에게서 받은 인상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포착해 독자적인 표현기법으로 선보였던 인상파 화가의 대표주자 빈센트 반 고흐.
세월의 흔적이 뭍은 탁자의 매끈한 질감이나 깊은 밤의 정적을 보이는 대로 재현하지 않고 그 사물과 공간들에게서 받은 느낌을 자기만의 방식대로 캔버스에 펼쳐놓았다.
빙글빙글 밤하늘을 가득 메운 고호의 아름다운 별빛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사는 동안 작가로서 주목받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과 현실 사이의 먼 거리 때문에 지치고 척박했던 그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은 화가만이 아니다.
문학에서도 유행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바로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는 자신의 작품 ‘노인과 바다’에서 늙은 어부와 물고기와의 80여 일 간의 처절한 사투를 쉽고 사실적인 문장에 담아 극 중에서 일어난 상황과 대화, 행동은 그대로 묘사하되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나 등장인물의 감정은 철저히 독자들이 해석해야 할 몫으로 남겨놓는 독특한 방식으로 노벨문학상까지 받게 된다.
작가가 겉으로 드러낸 것은 극히 일부이고 그 속에 숨겨진 것들이 훨씬 많았다고 하니 헤밍웨이의 문학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소설들을 모조리 다시 꺼내 놓친 부분은 없었는지 꼼꼼히 살펴볼 것을 권장한다.
책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요즘처럼 바쁜 시기에 집중해서 책 한 권 읽는 것도 나에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작품에 대해 깊이 고민하거나 논문을 준비하던 시기에는 한 번에 서너 권의 책을 동시에 읽을 정도로 다독을 했었다. 그렇게 책을 무작정 읽다 보면 읽기 전에 겁을 냈던 난해한 내용들이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정리될 때가 있다. 그렇게 우리 삶에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책이 앞에 놓여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하고 이해하는 방법은 가장 편한 지름길을 찾거나 가장 쉬운 해설집을 찾는 게 아니라 그 속으로 몸을 던져보는 것, 그래서 숲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길을 찾고 책 속에서 해답을 구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해결책이라는 것도 그때 깨닫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도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한 책이 한 권 있었는데 바로 질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이다.
1000 페이지가 넘는 두껍고 방대한 이 책은 내가 박사논문을 쓰겠다며 한참 글발이 올랐던 시절에도 하얀 건 종이고 검은 건 그저 활자였을 만큼 쉽지 않은 책이었다. 그래서 언제가 이 책을 완독하고 감상문을 멋지게 적어보는 것이 여전히 이루고 싶은 작은 목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화가와 작가들만 소중한 건 아니다.
오랜 시간 선생으로 살아왔던 삶이기에 내 인생 안에서 사람을 분류할 때 가장 많은 범위를 차지하는 것이 제자들이다.
미대이니만큼 학생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내고 나는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한다.
20년 가까이 강의를 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이 인연으로 잠시 스치거나 곁에 머물기도 하는데 그중, 가끔씩 나에게 연락을 하고선 자신이 현재 얼마나 행복한지, 때론 얼마나 힘든지 상세히 알려주는 남학생이 한 명 있었다.
어느 날은 힘들다는 이야기가 평소의 그것과는 다르게 느껴져서 뭔가 도와달라는 신호라는 걸 직감한 적이 있는데 비록 그를 위한 해결책은 내놓지 못했지만 열심히 들어주고 한동안 그 학생을 주시하며 연락을 이어가기도 했었다.
내 인문학 강의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마크 로스코, 인상주의 화가 고호, 노벨상을 수상한 헤밍웨이, 나를 도전하게 만든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 그리고 자신의 많은 감정을 나에게 나눠주었던 고마운 제자. 이렇게 다섯 사람의 공통점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그들이 어떤 이유로 왜 생을 마감했는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들의 우울함이나 내 감정 기저에 있는 상실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 안에는 행복도 있지만 그 보다 더 많은 정신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 인간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복잡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적어도 나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지워버린 그들을 원망하거나 판단하지 않겠다.
매년 전 세계 1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우리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교육을 받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40초당 1명씩 누군가는 본인의 삶에 대한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다.
가족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고 친구 간의 우정이 몹시 소중한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 국가로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매일 37.5 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수치를 결과로 보여준다.
외면하고 싶지만 결코 모른 척할 수 없는 통계, 당신과 가까운 누군가가 아주 잠시라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는 이 순간, 당신 역시 최근 유명인의 잇단 사망 소식에 잠시나마 우울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면 그들이 삶이 두려워 죽음을 선택한 게 아니듯이 우리 역시 죽는 게 두려워 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기 바란다.
삶과 죽음이 눈을 감았다 뜨는 것, 혹은 스위치의 전원을 껐다 켜는 것처럼 간단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 집중하게 되면 슬픈 선택을 한 그들의 죽음보다 우리의 삶이 훨씬 값지고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죽고 싶어.”
말속에 담긴 그 의미와 무게에 비해 그동안 우리에겐 깃털처럼 가볍고 먼지처럼 흔한 말은 아니었는지 반성해본다.